▲"버텨내고 존재하기"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엣나인필름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팬데믹 시기에 대응하는 도전의 산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희한할 정도로 절묘하게 아귀가 들어맞은 프로젝트가 된 경우에 속한다. 광주 출신 인디포크 뮤지션인 최고은은 고향에서 '홈 커밍' 프로젝트를 2019년부터 진행해 왔다. 고향방문 겸 동네를 알리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였다. 3회째를 맞이한 프로젝트는 하필 중간에 맞이한 역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양한 융-복합에 도전한 끝에 일정한 결과를 도출하기에 이른다. 그 결실이 1차로는 미디어 융합 라이브 형태로, 2차로는 음악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세 번째 프로젝트는 기획자인 뮤지션 최고은이 어릴 적부터 출입하던 광주의 오랜 극장, 그 이름마저 '광주극장'인 공간 요소요소를 무대로 활용한다. 마치 '프린지 페스티벌'처럼 일상의 공간이지만 예술과는 무관하게 보이던 우리 곁의 장소들이 순식간에 공연장이 되었다가 사라지는 방식이다. 관객은 이를 통해 극장이라는 장소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기획자 최고은의 권유에 응한 뮤지션들은 차례로 본인들이 선택한 극장 내 공간에 자리한 채 개성 넘치는 곡조를 뽑아낸다. 모든 파트는 스튜디오에서의 후반 추가가 아니라 오로지 공연 현장의 사운드만 기록한, '생짜 라이브' 형태로 행해졌다. 그 공연 앞뒤로 간단한 인터뷰와 스케치가 연결되는 식으로 옴니버스 공연은 차례로 계속된다. 대개 음악 다큐멘터리라면 음악인의 인생 경력과 공연실황이 연결되는 식으로 진행되게 마련이지만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통상의 유형과는 좀 다르다. '영화'로서 출발하기보다는 온라인 공연 기획에 좀 더 저울추가 기우는 시작점을 갖다 보니 말 그대로 공연장에 앉아서 무대를 지켜보는 체험에 가깝다.
영상이 가미된 개성파 뮤지션들의 옴니버스 앨범처럼
순서는 다음과 같다.
김일두는 <뜨거운 불>을 특유의 거칠고 탁하지만 뇌리에 꽂히는 음색으로 2층 복도에서 오프닝을 열어젖힌다. 다음으로는 김사월의 목소리로 <확률(Ray)>이 1.5층 계단에서 흘러나온다. 각자 자신이 처음 본 영화나 음악에 대한 경험과 소신을 피력하지만 김사월의 인터뷰는 가장 독립예술영화 관객들에게 익숙하고 호소력 있는 내용일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영향 받은 감독들로 에릭 로메르와 짐 자무시를 언급한다. 에릭 로메르는 현실에서 떠올리기 힘든 극단적인 사건들로, 짐 자무시는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찰나를 묘사하는 게 좋았다고 한다. 우리가 단조로운 일상에서 음악과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에 맞춰 어떤 영화의 단상을 농축하듯 특별히 만든 자작곡의 유래를 설명하는 그의 입담을 듣다 보면 손뼉을 절로 칠 법하다.
김사월과 교대하듯 스테이지를 이어받는 이는 같은 여성 포크 뮤지션 곽푸른하늘이다. <살아있기 좋은 날>을 부르는 그의 무대는 매표소다. 매표소 창구에 누군가 두고 간 '봉봉'을 마시는 풍경은 멀티플렉스의 번잡한 창구에선 상상할 수 없는, 정이 통하는 풍경일 테다. 그 다음 순서는 분위기를 확 바꿔 라틴 풍 인디 록을 펼치는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 등장해 <악어떼>를 상영관을 무대삼아 선보인다. 밴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옮겨온 유쾌한 익살은 만담을 통해, 경쾌하지만 신랄한 곡조는 무대에서 발휘된다. 상업주의에 항상 위태로운 대중문화의 초상을 고스란히 옮긴 듯 가사가 착착 감긴다.
이번에는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 기타리스트 이자원의 차례다. 연주곡 특성상 둘 사이의 대화 비중이 조금 더 높다. 그들의 만담 사이로 <마지막 만담> 연주가 영사실에서 흘러나온다. 만담이라는 키워드가 선율로 전해져온다. 다음 주자는 포크 뮤지션 정우다. 강렬한 음색이 귀에 꽂히는 <철의 삶>은 출입문 옆에서 쩌렁쩌렁하게 마치 관객을 불러 모으듯 울려 퍼진다. 마거릿 대처와는 정반대이지만 강력한 삶의 신조가 뇌리에 새겨진다.
바통을 이어받아 아마도이자람밴드가 <산다>를 사무실 내에서 공연하며 포효한다. 낡고 쇠락한 극장이지만 살아서 꿈틀댄다는 신호처럼 들리는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기획총괄이라 할 최고은이 주소영과 함께 <축제>를 미술실에서 공연한다. 공연의 헤드라이너까지는 아니지만 대미를 장식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실은 최고은 & 주소영의 공연 이전에 인터뷰 중심으로 구성된 하나의 챕터가 숨어 있긴 하다. 1993년부터 광주극장에서 회화로 영화소개 포스터를 그려온 박태규 화백의 인터뷰다. 해설이 크게 포함되지 않은 구성이지만 왜 기획자가 광주극장이란 공간에 애착을 갖고 이 기획을 통해 극장을 소개하려 했는지를 대신 전달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맡는다. 화백의 인터뷰를 통해 광주라는 공간의 역사성, 그리고 전혀 무관해 보이는 극장의 벽화 같은 영화 포스터와 화백이 대학시절 몸담았던 민중미술 걸개그림의 연속성이 심심한 척 하지만 진하게 묻어나온다.
하나의 세계관으로 형성되는 옴니버스 공연의 매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