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에의 노래> 스틸컷
미디어캐슬
잇코는 키리에의 매니저를 자처하며 우정을 나누는 인물이다. 그녀 역시 마오리라는 이름 대신 잇코를 쓴다는 점, 사기 혐의를 받고 사라진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런 잇코의 드라마는 키리에와 엮이는 부분만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캐릭터에 대해 감정을 이입하거나 그 사연을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키리에가 잇코를 통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서사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런 점은 나츠히코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언니 키리에와 사랑을 나누며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이이자, 동생 루카와 원치 않는 이별을 반복하는 인물이다. 그의 서사 역시 키리에 그리고 루카와 엮인 부분만 조명이 된다.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나츠히코가 겪는 개인적인 고민이나 아픔은 보여주지 않으며 남매의 서포트 역할에만 철저하게 머문다. 특히 루카와 엮이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시간조차 작품은 허락하지 않는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고사성어에 대해 우리는 한 가지를 오해하고는 한다.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며 지나친 것보다는 차라리 모자란 게 나은 것이라 여긴다. 과유불급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감독의 예술로 불리는 영화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힘든 이유는 지나쳐도 안 되고, 미치지 못해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 사이의 완벽한 중용(中庸)을 이루는 건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