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 이미지
커넥트픽쳐스
한국전쟁의 포성이 한창이던 때 '철수'는 태어났지만 전쟁 통이 아니라도 축복받은 탄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혼외자녀였고 어머니는 미군과 재혼해 한국을 떠나버렸다. 어린 나이에 그는 부모 없이 친척집에서 자라며 전후 빈곤을 고스란히 겪었다. 얼마 후 미국에서 이혼하고 혼자 살게 된 어머니는 12살의 철수를 데려간다. 빈곤 그 자체이던 한국과 달리 풍요로운 미국의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투잡을 뛰느라 낮밤으로 바쁘던 어머니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년의 곁을 지킬 틈이 없었고 영어가 서툰 동양계 소년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타락하지도 않은 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을 쏘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갓 스물을 넘겼을 때 차이나타운에서 일어난 갱단 간 총격살인사건이 그의 인생을 뒤바꿔놓았다. (아시아계를 제대로 식별할 경험이 부재한) 백인 목격자들은 그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배운 것도 조력자도 없어 자신을 방어할 수단도 갖추지 못한 외톨이 청년은 정당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일급살인죄로 교도소로 직행한다.
여기에서 미국의 악명 높은 교정행정의 폐단이 돌출한다. 교도소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옥 갱단 중 한 곳에 속해 보호를 받아야 한다. 멀쩡한 시민이 생존을 위해 범죄 집단과 연루되는 출발점 노릇을 교도소가 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어디에도 낄 수 없던 동양계 청년은 쉽게 표적이 되고야 만다. 자기 방어로 그는 4년 후 악명 높은 아리아 형제단(백인우월주의 지향) 갱과 충돌해 또 다른 살인죄를 얹게 된다. 이젠 정말 가스실에서 짧은 인생을 끝마칠 판이 되고만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덕분에 그의 혐의에 의혹을 품게 된 이들이 합류한다. 지역 내 유력매체 기자였던 당시 샌프란시스코 지역사회 내 유일한 한국인 기자 이경원과 아시아계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합세한 것이다. 청소년 시절 그와 절친이던 일본계 랑코 야마다 역시 법률전공으로 변호사가 되어 지원팀에 가세한다. 이들은 이 영화의 제목이 된 '프리 철수 리', 철수에게 자유를 캠페인을 시작하고 항고소송을 개시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교포사회의 허브 역할을 하던 한인교회가 앞장서 역할을 소화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으로 주인공의 시련이 마침표를 찍은 건 아니다. 한때 두 번째 살인 혐의로 사형 선고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변호인단의 노력으로 살인죄를 뒤엎는 증거를 발굴해 그는 1983년, 10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다.
여기까지로 영화가 마무리를 찍었다면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자주 목격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감동적인 법정드라마로 끝이 났을 테다. 실제로 그의 사건을 각색한 영화가 제임스 우즈 주연으로 상업영화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혐의로 적용된 두 번째, 실제로 교도소에서 저지른 살인은 사법거래의 대가로 유죄를 인정하고 풀려나야만 했다. (이 때문에 이철수는 정부를 대상으로 한 명예회복이나 피해보상을 거의 얻지 못했다고 전한다.) 사실상 첫 번째로 누명을 뒤집어쓴 살인용의자 취급이 아니었다면 두 번째 살인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미국 정부는 그런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반성도 책임도 지지 않은 것이다.
씁쓸한 후일담이 오히려 진한 감상을 남기는 후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