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사람"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찬란
영화는 의도적으로 탈북민 주인공의 사정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려 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서 한영이 탈북민이라는 것은 그저 '흙수저' 배경이거나, 혹은 '그룹-홈' 출신 보호위탁아동이거나, 미등록 이주민 같은 불리한 조건과 별반 다르지 않게 주어지는 제약이다.
이 작품에서 굳이 민족문제나 분단모순은 영화의 전개를 결정짓는 요소로 활용되지 않는다. 그저 한국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사는 데 불리한 조건의 하나로, 혹은 '이등국민' 취급받기 좋은 조건으로 자리할 뿐이다. 그래서 주인공을 관리하는 형사의 존재나 일부 장면을 제외한다면 그저 가진 것 없고 부모 덕 보기 힘든 또래 세대 취업난민 청년들과 한영의 상황이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이런 면모가 본 작품이 탈북민 소재를 다루는 여타 작품들과 대비되는 대표적인 차별지점이다.
이런 특유의 방향성과 색깔은 두 가지 결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첫 번째로는 한국사회 내 탈북민 집단에 대한 현실적 규정이다. 과거에 극소수가 유입될 때는 귀순용사, 또는 자유대한의 품에 생사를 걸고 탈출한 동포로 상당한 우대를 받던 이들이지만 북한의 경제난과 기아 이후 이들 숫자가 폭증하면서 어느새 천덕꾸러기 취급이 된 지 오래다. 국내에 물경 3만 4천여 명이 넘게 존재하는 이 집단은 이제 일정한 정착금 몇 푼에 몇 가지 태부족한 지원정책만 의지해 자력갱생해야하는 운명이다.
거기에 더해 단일민족국가라는 환상적 정체성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 외국인 이민자와도 동떨어져 섬처럼 표류하는 신세다. 이 영화 속 탈북민의 묘사는 앞서 언급했듯 현재 한국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거나 편입되지 못한 존재들과 탈북민 존재감이 (사실상 난민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동일하다는 선언 격이다.
두 번째로는 위와 같은 묘사 때문에 탈북민이 겪게 되는 절박함과 실망감이 원심력으로는 더 보편적인 감정으로 다가오는 반면에, 오히려 해당 측면이 상당한 이질감으로 전해질 가능성이다. 관객들에겐 보다 익숙한 탈북민 집단의 이중적 성격이 감독의 의도에 의해 일정부분 탈색되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영상물들이 기본전제로 삼던 탈북민 묘사의 중심축, 한민족이라는 정체성 vs. 전혀 상이한 사회문화적 조건에서 살다온 이질성을 동시에 갖는 존재감이 희석된다는 측면이다. 넓게 보면 탈북민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성찰로 이어질 테지만 단기적으로는 그들의 사정이나 애환이 희석되는 것 같은 간극이다.
이런 온도차이는 어쩌면 탈북민 집단 외에 주인공이 동 세대 한국 청년들과 교류하거나. 혹은 타국에서 한국에 온 이방인들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청사진으로 보다 선명하게 그려졌을 것처럼 보인다. 물론 중국인 의동생 '리샤오'를 통해 그 역할을 소화하고자 시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해당 지점이 조금 더 보강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전통적인 탈북민 묘사를 가능한 다르게 변주하려 했음에도 인상적인 부분도 있다. 관광 가이드로 생업을 삼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서울 도심 관광도 해볼 기회가 없던 한영이 파트너 정미와 함께 남산 전망대에서 벌이는 작은 에피소드는 굳이 소리 높여 외치지 않고도 해당 집단이 갖는 우리가 놓치던 설움을 일깨우는 인상적 순간으로 남는다.
기대와 절망 사이, 마지막 주인공 표정의 의미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 스틸 이미지
찬란
감독의 비전을 화면에 구현하는 건 결국 배우들의 몫이다. 일단 주요 캐릭터가 모두 탈북민이기에 다큐멘터리가 아닌 한 배우들의 캐릭터 재현도가 사활적 요소일 수밖에 없다. 일단 실제 탈북민 출신 연기자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어색한 발성이나 대사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감독과 제작진, 배우들이 충분한 여유를 갖고 충실히 준비했기 때문임이 여실하다. 실제 탈북민 당사자의 심경과 태도를 화면 가득히 구현해낸 한영 역의 이설 배우 연기는 2023년 독립영화를 상징하는 '얼굴' 중 하나로 각인될 만하다. 예전 출연 드라마에서 탈북민 캐릭터를 연기한 경력이 있긴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에서 이 배우의 연기는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도달한다.
처음엔 발음도 어휘도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살짝 미래에 대한 열정과 희망이 엿보이던 표정과 눈빛에서, 점점 본인이 직접 탈북민이라 언급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신분위장(?)이 가능한 수준으로 영화 속에서 3년간 캐릭터가 변화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앞에 놓인 장벽은 배우가 연기하는 한영 캐릭터의 표정에서 물이 빠져나간 옷처럼 드러난다. 미묘한 변화를 관객이 알아차릴 때 살짝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리고 배우의 얼굴과 시선이 전적으로 소화해야 할 분량이 상당한데, 국면에 부합되는 이설 배우의 비언어적 표현력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해도 무방한 차원이다. 영화를 본다면 꼭 집중해서 관찰해야 참맛을 누릴 지점이다.
또한 한영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던 영혼의 파트너 정미 역의 오경화 배우 등 주요 배역의 연기력도 주인공 못지않게 현실의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물론 소소한 장면과 대사 한두 줄로 주인공의 심경을 구현하는 감독의 연출력도 만만찮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한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국사회에서 그가 받을 수밖에 없는 신뢰치를 표상하는 가불 장면은 쐐기처럼 관객의 뇌리에 박힐 테다. 결국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지만 한국사회 속에 숱한 장벽을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 그렇다면 이 영화 속에서 묘사하는 대로 평범한 취업준비생의 고초와 주인공의 체험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법하다. 여기에 대한 대답.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 땅에 태어났을 뿐이지, 한영과 동생처럼 사지를 헤치고 죽음을 각오하며 (또 다른 조국이 환대해줄 것이란 기대만 의지해) 사선을 넘나들지는 않았지 않느냐는 답변을 전할 수 있겠다. 한국독립영화에서 양산되는 청년잔혹극에 휩쓸리지 않고 주변의 등잔 밑을 섬세하게 돌아보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통찰력 넘치는 풍경은 오리지널 평양냉면처럼 첫맛은 심심하지만 여운 가득 남는 감상을 (영화와 접속하게 될 관객에게) 전해줄 테다.
<작품정보> |
믿을 수 있는 사람 A Tour Guide
2023|한국|드라마
2023.10.18. 개봉|95분|12세 관람가
각본·연출 곽은미
출연 이설(한영 역), 오경화(정미 역), 박세현(리샤오 역), 전봉석(인혁 역),
이노아(미선 역), 우정원(청하 역), 박준혁(태구 역)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 KAFA
배급 찬란
2023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 배우상(이설)
2023 28회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2023 11회 디아스포라영화제 '디아스포라 장편'
2023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지금 여기, 한국영화'
2023 5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장편 경쟁'
2023 22회 뉴욕아시안영화제 'Beyond Borders'
2023 42회 밴쿠버국제영화제 '파노라마'
2023 21회 피렌체한국영화제 'K-우먼', '한국독립영화'
2023 20회 홍콩아시안영화제 '와이드앵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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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