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스틸 이미지
(주)시네마달
영화는 장편으로는 짧은 분량, 어쩌면 좀 긴 단편으로도 가능했음직한 내용으로 두 편의 뮤직비디오 탄생과정을 담는다. 외형적으로는 요즘 프로모션에 공들인 뮤지션의 신보 제작과정에 수록된 부가영상이 좀 많이 확장된 형태의 다큐멘터리 버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크게 예술적 비전이나 사회적 고찰을 추가하려 고심하지 않은, 순수하게 해당 작업에 대한 소개영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영화가 다루는 소재 때문에 상당수의 관객들에게 해당 작업은 흡사 몇 해 전 상당한 주목을 얻었던 다큐멘터리 <성덕>의 반대편에 위치하는 느낌으로 다가올 듯하다. 입시에 찌든 10대 시절을 아이돌과의 유사연애를 통해 극복한 당사자가 아이돌의 사회적 범죄행각에 직면하는 딜레마를 담은 <성덕>에 비해,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대학 영화과 졸업과 함께 갈 길을 잃고 방황할 위기에 처한 공동감독과 동료들이 새롭게 만난 피난처이자 등불과 함께 성장하려는 여정의 기록이다. 무명감독과 무명가수는 서로에게 최적의 조합이 되어줬고, 영화의 도입부에 짤막하게 삽입된 가수의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 소식과 함께 하나의 서사가 완성되는 행운을 누린다. 하지만 그 극적인 서사를 그저 지나가는 환호 장면 하나로 흘려보내는 게 이 영화의 맛이다.
영화는 부가영상에 가까울 정도로 투박하고 담백한 스타일이다. 요즘 온갖 정교한 사전기획으로 제작되는 장편 다큐멘터리 스타일에 익숙해진 이들이라면 이 영화의 상상 초월 러프 스타일이 오히려 걱정될 만큼 이야기는 느슨하고 구성은 단순하다. 굳이 안 보여줘도 될 것 같은 신세한탄이나 딱히 특별할 것 없어 뵈는 준비과정이 여과 없이 그대로 들어차 있다. 셀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제작진 조명 부분은 그냥 고정된 화면채로 이어진다. 정말 되는 대로 찍어댄 모양새다.
그래서 영화는 투박한 날것의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게 평양냉면 맛처럼 심심하게 저며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게 제법 신기한 부분인데 그런 과정에 감독들의 숨겨진 기획이나 음모(?!)가 거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관객이 저절로 지쳐서 그런지 적응해버리는 식으로 그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러닝타임이니 어떻게 매듭이 지어질까 약간의 인내와 함께 진행과정을 그냥 구경꾼이 되어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특별한 변곡점 없이 이야기는 대단원을 향해 나아간다.
Do It Yourself! 실천 그 자체인 제작과정의 정감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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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작진이 겪게 되는 시련과 극복과정은 거칠긴 해도 실감나게 전해져온다. 통상적인 극영화 위주로 작업해 왔기에, 학과의 정해진 제작환경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어 왔기에 전혀 생소한 뮤직비디오 제작과 관련된 실무 진행은 도전 그 자체로 묘사된다. 제작 세트를 대여하고, 스태프를 구성하고, 시나리오를 가다듬고, 이미지를 구현할 소품을 마련해야 한다. 안되면 되게 하라! DIY 정신으로 이들은 며칠을 새워가며 자가제작하고 품을 들여 저렴한 비용에 '득템'하려 동분서주한다. 그 과정이 안쓰럽지만 풋풋하게 관객의 뇌리에 스며든다.
이것저것 시행착오를 거쳐 신곡 <영웅수집가>의 뮤직비디오는 감독들의 헌정(?!) 뮤직비디오였던 전작 <무명성 지구인>에 비해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어어 하는 사이에 완성되기에 이른다. 뮤직비디오에 처음 도전한 공동감독들이 영화 내내 보여준 설익음과 함께 자신들을 갈아 넣는 과정을 봐온 이들에게는 뮤직비디오가 용케 완성되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더불어 완성된 영상의 그럴싸한 그림에 대한 경외감이 살짝 깃들 정도다. 그리고 이들은 가수와 함께 쫑파티를 치르고 서로를 격려하며 헤어진다.
물론 가수는 이후 상당한 성공가도를 달리는 중이지만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고 그 제작기를 다큐멘터리로 완성한 제작진에게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없어 보인다. 이제 세트 정리하고 다시 앞길을 모색해야 할 숙제만 남았다며 앞으로 뭐하고 살지 궁리하는 풍경이 이어진다. 잘 몰랐던 무명의 인디뮤지션을 좋아하게 되고 그를 통해 포기 혹은 그저 생계를 위한 기술로서만 남았을지도 모른 영상제작기술을 활용하게 된 제작진은 하지만 처음의 좋아서 시작한 작은 사건 덕분에 충분히 많은 걸 얻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완성은 제작진의 열정이 농축된 이승윤의 뮤직비디오 2편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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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때는 대역병이 창궐하던 바로 그해였고, 아마 이들이 <무명성 지구인>을 쏘아 올리지 않았더라면 당시 개점휴업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무수한 동료들처럼 그저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며 '듣보인간'으로 남았을 테니까. 하지만 어떤 듣보인간들은 그런 시절에도 그저 듣보인간 1/2/3호로 남지 않고 자신들의 족적을 남기려 필사의 도전을 행했다. 그리고 운 좋게 그 결과를 아로새기는 데 성공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이지만 동 시기 숱한 영화과 졸업생들의 마치 자화상 같은 단편 극영화들 중 일부가 선보이는 격려와 치유의 드라마와 일맥상통하는 기운이 <듣보인간의 생존신고>에는 가득 날것 그대로 상태로 출렁댄다. 그런 면에서 장르를 뛰어넘어 동 세대의 자기반영 성격이 짙고, 그 때문에 투박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강점이 있는 작업이다.
그 거칠지만 살아 있다는 증명은 자기를 포장하려는 가식과는 거리가 멀어서 오히려 맥이 풀릴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왜곡 없이 순도 있게 채워진 지점에서 본 작품의 기이한 생명력이 출발한다. 분명 빤한 전개와 예측 가능한 장면, 그리고 콤팩트한 편집과 담을 쌓은 구성까지 세련된 영화를 선호하는 이들이라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게 만들 요소로 가득한데 묘하게 끌리는 매력이 남는 작품이다. 뭐든 한 가지만 확실히 챙기고 진심을 담아보자는 소박함의 개가 같은 소품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영화를 보고 나면 온전히 내용 속에서 공개되지 않은, 이들이 제작한 두 곡의 뮤직비디오를 온라인에서 검색하게 된다. (모두 가수의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명성 지구인> <영웅수집가>의 소개 글에는 가수가 제작진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가 여전히 절절하게 녹아들어 있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데 외롭고 지친 이에게 동방박사의 별처럼 희망의 길잡이가 되어준 또 다른 '듣보인간'들의 지지와 성원이 빚어낸 소소하지만 절실했던 작은 기적을 확인하는 데 이만한 증명이 또 있으랴. 영화를 본 다음이라면 꼭 해당 뮤직비디오를 확인해볼 일이다. 영화의 여운과 함께 감동이 세 배는 배가될 것을 보증한다.
<작품정보> |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Notes from the Unknown
2021|한국|다큐멘터리
2023.09.06. 개봉|79분|전체관람가
감독 권하정, 김아현
출연 권하정(듣보인간1), 김아현(듣보인간2), 구은하(듣보인간3), 이승윤
제작 ㈜에이치더블유
배급 (주)시네마달
2021 47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2022 9회 마리끌레르영화제
2022 10회 무주산골영화제
2022 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2022 24회 정동진독립영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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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좋아하는 가수 뮤직비디오 만들어 보냈더니, 답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