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노 프리즘>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영화가 시작되면 자기 정체성이 '배리어프리 Barrier-Free' 영화라고 <피아노 프리즘>은 초입부터 선언하다시피 스스로에 관해 정의한다. '배리어프리', 요즘 들어 낯설지는 않은 용어다. 여전히 비장애인 위주로 설계된 극장 시스템에 대해 시청각 장애인이 영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장벽'을 낮추거나 넘어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영화를 말한다. 해당 부류의 작업들은 국내에서 '배리어-프리' 혹은 '가치봄' 영화로 명기되어 소개되는 중이다.
국내에선 2012년부터 '사단법인 배리어프리 영화위원회'가 결성되어 해당 유형의 영화작업을 시작했다. (관련 단체는 사회적 기업 형태로 배리어프리 영화제를 개최하는 등 국내 배리어프리 영화 소개와 보급에 핵심 기능을 수행 중이다) 그리고 일부 멀티플렉스 체인에서 간단한 형태의 편집을 거친 버전을 장애인단체와 연계해 사회공헌 겸 시장다변화 모색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해당 개념이 반향을 얻어가면서 지역 미디어센터와 영화교육기관에서도 도입과 적용이 활발해졌다.
대부분 기존 비장애인용 버전이 완성된 후 음성해설과 자막 삽입을 통한 재편집 형식으로 배리어프리 영화가 탄생하지만 근래 들어 극소수나마 일종의 '기술실증' 모델로 처음부터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제작되는 작업이 생겨나는 중이다. 물론 현재까지 확인된 건 단편영화가 절대 다수이며 여전히 절대다수의 배리어프리 영화는 기존 영화의 개량 위주로 작업되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극장 개봉에 이르는 장편 버전은 본 작품이 거의 최초에 가깝다. <피아노 프리즘>은 그런 면에서 신기술 도입과정에서 기술실증모델에 가까운 도전인 셈이다. 왜 감독은 홍보카피 한 줄 넣는 것 말고는 개봉과정에 불리한 점만 가득한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자신의 첫 장편을 완성한 걸까?
이상한 감독의 연대기가 펼쳐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피아노 프리즘>을 탄생시킨 창세의 주인, 감독이 궁금해질 차례다. 오재형이란 감독을 필자는 '오쟁'이라 부른다. 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감독이 스스로 '예술잡상인 오쟁'이라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미술을 전공한 그는 현대예술의 특징 중 하나인 미디어아트로 관심을 넓히다 어느새 영화를 작업하고 있었다. 그는 다큐멘터리로 주로 분류되긴 했지만 형식 측면에서는 설치미술과 애니메이션 기법을 종횡무진 실험하고, 내용 면에서는 흔히 사회참여 예술가들의 관심분야인 동시대의 쟁점들을 현장에 밀착해 포착하고 있었다. 직접 클레이, 퍼펫, 스톱 모션, 로토스코핑, 유화 셀 애니메이션 등 수작업으로 시도하는 다양한 시도는 훌륭한 눈요깃감이었지만 감독이 우직하게 세상에 반문하는 모순과 설움에 대한 질문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쉽게 떠내려가지 않는 응어리를 남겼다. 다시 한 번, "이 사람,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정의하던 주인공은 의식의 흐름 마냥 자연스럽게 '영화감독'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몇몇의 영화제들에선 꾸준히 주목받고 소개되기에 이른다. (그 영화제의 목록 중에는 '칸' 영화제도 포함된다!) 그렇게 미디어아트에서 넘어온 독립/실험 다큐멘터리 신진 작가군의 일부로 그는 자연스럽게 '(독립/실험)영화인'이 되었다. 요즘 각광받는 전 방위 예술가의 반열에 오를만한 활약상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났다면 이 영화가 나왔을 리 없다. 종횡무진 좌충우돌 활약하던 중에 주인공의 입에서 무서운 말이 불쑥 튀어나오고 만다. "피아니스트 오재형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픈 새로운 욕망이 그에게서 자생적으로 발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극중 본인 입으로 밝힌 바 대로 밥 먹고 피아노만 치는 생활을 한참 동안 진행한다. 그리고 틈틈이 '하이브리드'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초반에는 본인이 작업했던 기존 영상에서 사운드를 제거하고 마치 영화 탄생 초창기에 흑백무성영화를 극장에서 밴드 연주와 함께 공연하던 형태처럼 시연한다. <덩어리> 같은 그의 단편 대표작이 그런 방식으로 재탄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점차 '비디오 리사이틀'이란 형식으로 '영상 투사+설치+라이브 공연'이 결합된 공감각적 퍼포먼스로 변모해간다. 그런 예술적 도전의 한 종착역이 <피아노 프리즘>이 탄생하게 된 산파 격인 2019년 7월 15일 '비디오 리사이틀' 공연인 셈이다.
화면 속 투영되는 다채로운 프리즘 반사광들
▲영화 <피아노 프리즘>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그런 영화의 출발은 감독 본인의 작업실 풍경이다. 작업실에서 감독은 피아노를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가며 힘을 쓴다. 그리고 피아노의 구조가 한눈에 들여다보이도록 나무 부속을 차례로 탈거한다. 그 결과 마치 혈관처럼 건반에 미묘한 힘을 가하는 부속 구조가 훤히 드러난다. 그리고 평범한 작업실 천장에 수작업으로 미니 빔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영상을 투사해 작업공간을 초현실적 판타지의 배경처럼 탈바꿈시킨다. 짙은 어둠 속에서 감독 본인이 피아노를 연주하면 자연스럽게 드뷔시의 '월광'이 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관객의 귓가에서 자동으로 재생될 법한 풍경이다. 하지만 그렇게 근사하게 변신했던 작업실의 반대편에는 주인공이 쪽잠을 자는 매트리스와 밥을 해먹는 주방이 붙어 있다. 온갖 장비와 소품으로 가득한 이 원룸에서 그는 9할의 시간을 틀어박혀 작업에 매진해온 것이다.
그러던 감독이 외출 준비를 한다. 깨알 같이 눈에 익숙한 광화문 일대 전경이 펼쳐진다. 세월호 천막도 보인다. 감독도 어느 틈에 그 한 구석에 피켓을 든 채 서 있다. 하지만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친 화면은 피아노 학원으로 향한다. 감독은 통 피아노 실력이 늘지 않는다며 '사부님'과 고민 상담을 나누고 연습에 돌입한다. 고민이 많은지 자신이 무슨 책을 읽어봤는데 음감은 7살 때, 속도는 11살 때 이미 결정이 난다면서 20살 넘어 시작한 자신은 어떡해야 하냐고 근심걱정을 늘어놓는다. 어안이 벙벙한 피아노 스승님이 뒤늦게 시작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포기하는 것보다는 늦게 시작한 게 좋지 않으냐며 위로하자 금방 해맑은 목소리로 자신은 70살까지 피아노를 연주할 거란다.
그런 와중에 감독이 참여한 여러 프로젝트 진행이 휙휙 지나간다. 그런 작업 하나하나에 영감을 얻어가며 주인공은 다시 피아노 학원에서 맹훈련을 거듭하고, 공연준비에 본격 들어가기 시작한다. 작곡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피아노 교습 스승에게 작곡 의뢰를 하기도 한다. 적정 대가를 지급하기 위한 협상 과정이 사제 관계 사이에서 벌어지지만 주인공은 결코 후려치기나 읍소는 하지 않는다. 그렇게 감독이 실행하는 다종다양한 공연 퍼포먼스가 짤막히 교차되면서 영화는 절정으로 달려간다. 떨리는 심정을 반영하듯 공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덜덜 떨던 발이 어느새 차분해지고 그럴 듯하게 의관을 정제한 주인공이 공연장에 선다. 712회 더 하우스 콘서트, "오재형의 비디오 리사이틀" 2019년 7월 15일 공연현장이다.
실제 해당 공연의 구성처럼 영화는 지금까지 영화감독으로 분류되는 감독의 작업 대부분을 포괄한다. 2008년 2분 분량 애니메이션 <쇼팽이미지에튀드>, 2015년 6분여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 <강정 오이군>, 2016년 선보인 퍼포먼스 단편 애니메이션 <블라인드 필름>, 같은 해에 나온 21분여 다큐멘터리 <덩어리>, 감독의 독창적 실험으로서 '비디오 리사이틀'의 한 예시가 된 2018년 <보이지 않는 도시>, 같은 해 작업한 5.18 추모 댄스필름 <봄날>, 제목은 크레디트에 표기되지 않지만 감독 본인의 무의식을 투영하듯 묘사되는 실험 다큐멘터리 <모스크바 닭도리탕>에 이르기까지 감독의 거의 모든 작업이 <피아노 프리즘> 안에서 말 그대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느낌이다. 장편 데뷔작 이전까지 본인의 모든 영상물을 흡수해 변신·합체시켜버린 결과물 격이다. 물론 단순 조합과는 형질 자체가 다른 '화학적 결합'이다.
현대 '예술잡상인'의 초상을 제대로 구현한 작업의 목격담
▲영화 <피아노 프리즘> 스틸 이미지
필름다빈
그런 가운데 공연이 끝나고 감독은 화면 속에서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는 중이다. 장르와 분야를 건너뛰면서 변화무쌍한 크로스오버 그 자체인 행보를 선보이는 건 현대미술가의 전형 그 자체이지만 주인공은 매 시기마다 주력하는 부문이 선 굵게 나눠질 뿐 오만한 태도로 특정 분야에선 더 이룰 게 없다는 식의 선언은 일삼지 않는다. 자신은 '번복'과 '철회'가 장기라며 언제든 다시 흥미를 찾거나 해야겠다 싶으면 컴백하는 건 자유라며 해맑게 웃어넘기곤 한다. 누구나 과정 대신 결과, 그것도 타인에게 눈에 띠는 외형적 성공에 집착하게 되는 2020년대 한국에서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건전한(?!) 청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저 작업이 즐겁고 도전을 겁내지 않는 이 시대 건실한 청년예술가로 주인공은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막바지에 달하자 화면 가득히 강정 구럼비→용산 참사현장→백남기 농민→시위대와 진압경찰→세월호가 가라앉던 현장이 감독이 손수 작업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펼쳐진다. 거기에 애잔한 선율이 그의 연주로 채워진다. 현대 개념미술의 모든 구성조건이 이 영화 속에서 오재형이라는 존재와 그의 퍼포먼스를 통해 채워진다. (다종다양한 장르 융·복합을 통해) 작품이 형상화되는 과정-작가의 자의식과 결과물의 연결성-인문사회 측면의 함의와 해석-사회비판적 메시지-이 모든 행위의 주관자로서 작가 본인에 대한 호기심까지 <피아노 프리즘> 안에서 온전히 구조화된다.
그저 소박하고 성실한 예술 실천의 기록이라기엔 이 영화는 '관종' 주인공의 야심찬 비전이 꾹꾹 압축되다시피 한 욕망의 항아리 같은 작업이다. 우리는 예술가에게 일정한 선에서 평범한 이들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거두는 대신 그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기능을 책무로 부여하곤 한다. (베짱이로 흔히 통칭되는 예술가에 대한 공적 지원은 그런 효용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잠수함 토끼'나 '광산의 카나리아' 같은 상징이 그런 정체성을 표기하는 데 종종 쓰이곤 한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에게 더 많은 조건과 기회가 온다면 무엇이건 보여주고픈 욕망이 차고 넘치는 '야망캐' 타입에 가깝다. 그에게 보다 다양한 창작을 위한 도전이 가능하기를 성원하는 바이다.
p.s. 이 흥미로운 예술잡상인에 대해 아직도 궁금한 게 많은 이들은 감독이 직접 쓴 에세이 <피아노를 치며 생각한 것들 - 좋아하는 일을 좇는 삶에 관하여> (2021, 원더박스), <넌, 생생한 거짓말이야 - 나의 공황장애 분투기> (2019, 이상북스)로 작가에 대해 더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일단 영화 못지않게 책도 재미있다.
<작품정보> |
피아노 프리즘 Piano Prism
2021|한국|다큐멘터리
2023.08.30. 개봉|91분|전체관람가
감독 오재형
촬영 오재형, 나바루, 김석, 조이예환, 김찬민, 정효섭
편집 오재형
출연 오재형
화면해설 오재형
배급 필름다빈
2022 19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한국환경영화부문 우수상
2022 2회 Jeolla누벨바그영화제 심사위원작품상, 최우수감독상
2021 26회 부산국제영화제
2021 47회 서울독립영화제
2022 10회 광주독립영화제
2022 10회 무주산골영화제
2022 22회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2022 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2022 19회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22 13회 부산평화영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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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그냥 묻히기엔 너무나 비범한 영화 주인공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