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에서의 증언은 위증이었습니다. 온 세상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실을 숨긴 이들은 저 말고도 많습니다. 명령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KGB와 당 중앙위원회로부터요. 현재 동일한 결함을 지닌 원자로가 16개나 있습니다. 그 중 셋은 지금도 가동 중입니다. 여기 체르노빌에서 20km도 안 되는 곳에서요."
HBO 드라마 <체르노빌> 5화의 클라이맥스. 소비에트연방 과학기구 소속 핵물리학자이자 체르노빌 원전사고 조사위원이었던 레가소프 교수는 "당신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경고에도 위와 같은 사자후를 토해 내며 진실을 알린다. 그에 앞서, 1986년 8월 IAEA가 주관한 특별회담에 참석한 그는 소련 정부의 책임보다 원전 관련자들의 과실을 지적하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사실이 아니었다. 아니, 당시 체르노빌 원전 참사의 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소련 정부와 KBG 비밀 경찰의 압박과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체르노빌 원전 참사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녹음테이프와 조사 자료를 남겨 둔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소련의 관료주의와 과학을 부정하는 반지성주의를 막지 못한 죄책감과 책임감이 뒤엉킨 선택이었다.
실존 인물인 레가소프 교수의 목숨 바친 헌신에도 소련 정부는 사실을 은폐하기에 바빴다. 1986년 4월 발생한 체르노빌 참사에 대한 소련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사고 관련 사망자는 원자력 발전소 관계자 2명, 소방관 29명 등 총 31명이 전부였다. 체르노빌에 사람이 다시 거주하려면 3천 년이 흘러야 가능한 대참사인데 관련 사망자 숫자는 터무니없다. 사실의 은폐와 축소가 공공연히 자행됐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숫자다.
후쿠시마 원전 참사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일본드라마 <더 데이스>를 보면, 참사 당시 콘트롤타워였던 간 나오토 일본 전 총리나 도쿄전력 간부들 모두 체르노빌 참사의 결과를 시뮬레이션으로 돌려 봤던 것으로 보인다. 후쿠시마 원전 참사 역시 1호기 전체가 폭발했다면 일본의 운명을 가를 대참사로 번질 가능성이 대두됐었다.
<더 데이스>는 참사 2년 만에 암으로 숨진 요시다 마사오 도쿄전력 제1원자력 발전소 소장이 남긴 저서 <요시다 조서> 및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 보고서>, 그리고 참사 관련자 90명의 이야기를 담은 <죽음의 문턱을 본 남자> 등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 당사자들을 포함해 현장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이 실화 드라마 속 메인 빌런(악당)이 그러니까 도쿄 전력 수뇌부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더 데이스> 속 메인 빌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