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오른 무명 가수 올리버 앤서니
유튜브 radiowv 캡쳐
컨트리는 미국을 상징하는 대중음악 장르이자, 백인 보수주의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악이다. 그러나 '미국적'인 색채가 워낙 강한 탓에 세계적인 확장성을 얻지는 못했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2010년대 최고의 팝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컨트리의 틀에서 벗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올해 미국 최고의 히트곡은 컨트리 가수 모건 월렌의 'Last Night'으로 기록될 듯 하다. 'Last Night'은 랩의 리듬감과 중독성 있는 멜로디를 갖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컨트리 송이다.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총 16주(비연속) 1위에 올랐다. '레드 넥(미국 교외에 거주하는 하층민 백인)이라는 말은 미국에서 흔히 멸칭으로 쓰이지만, 월렌은 보란듯이 'Red Neck Love Song'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월렌의 바통을 이어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오른 가수는 77년생 컨트리 베테랑 제이슨 알딘이다. 그가 부른 'Try That In A Small Town'은 철저한 정파성을 띠고 있는 곡이었다. 공공 질서를 저해하는 행위를 작은 마을에서 했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겼다. 뮤직비디오에는 'Black Lives Matter' 시위에 나서고 성조기를 짓밟는 시위대의 모습이 '나쁜 짓'의 사례로서 등장한다.
뮤직비디오가 테네시주 법원에서 촬영되었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 테네시주 법원은 1927년 18세 흑인 소년 헨리 초트가 수백 명의 백인에게 집단 린치를 당했다가 사망한 곳이기도 했다. 가사는 한술 더 뜬다. '나에게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총이 있다'면서 총기 소지를 긍정하기도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캔슬 컬쳐(Cancel Culture)의 공격 대상이었다. 모건 월렌은 친구와의 대화에서 흑인 비하 표현인 'N Word'를 썼다가 보이콧의 대상이 되었다. 백인 음악팬들은 이 현상을 보고 오히려 월렌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소비했다. 월렌이 최근 발표한 앨범의 모든 수록곡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했다.
제이슨 알딘은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며 컨트리 전문 채널로부터 보이콧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 보수층은 알딘에게 자신을 투영했다. 음원과 음반을 구매했다. 심지어 그 지지자 중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있었다.
미국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모건 월렌의 'Last Night'과 달리, 제이슨 알딘은 차트 1위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차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다음 주 21위로 하락했고, 모건 월렌이 다시 1위에 복귀했다. 이 노래가 미국 보수 세력의 조직적인 후원에 힘입어 1위에 올랐다는 근거다. 차트가 현상을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현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새로운 '워킹 클래스 히어로'의 탄생
▲ Oliver Anthony - Rich Men North Of Richmond ⓒ Oliver Anthony
그리고 얼마 전, 또 다른 컨트리 노래가 역사를 썼다. 버지니아 출신의 백인 가수 올리버 앤서니가 그 주인공이다. 올리버 앤서니의 'Rich Men North Of Richmond'는 테일러 스위프트 등의 슈퍼스타를 제치고 최근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올랐다.
숲속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올리버 앤서니의 라이브 영상은 영상 공개 2주 만에 조회수 4천만 회를 넘어섰다. 컨트리계에서 꾸준히 명성을 쌓아온 모건 월렌이나 제이슨 알딘과 달리, 올리버 앤서니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가수였다. 지금까지 그 어떤 차트에도 진입한 적이 없다.
올리버 앤서니의 삶은 미국 노동 계급의 애환 그 자체다. 열일곱 살 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서 일했지만, 노동 중 두개골 골절 사고를 당했고, 이후 10년 동안 일용직 노동을 전전했다. 얼마전까지 집 없이 캠핑카에서 잠을 해결했던 그는 꾸밈없이 노동 계급의 현실을 노래한다.
쉼없이 일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을 노래하는 모습은 80년대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닮았다. 그는 미국의 주류 세력을 '리치몬드 북쪽에 사는 부자'로 지칭하며, 복지 정책의 허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것은 여과없는 노동자의 언어이자, 남부 백인의 세계관이다.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나는 매일같이 일하며 내 영혼을 팔아요.
쥐꼬리만한 돈을 위해 잔업을 하죠
So I can sit out here and waste my life away
Drag back home and drown my troubles away"
그러니 나는 여기 나와서 내 시간을 낭비하죠.
내 몸을 집으로 이끌고, 술로 모든 시름을 달래죠
- 'Rich Men North Of Richmond' 중
이 곡을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기 다른 정치적 해석을 내놓고 있다. 노골적인 보수 편향성을 드러낸 제이슨 알딘과 달리 올리버 앤서니는 '나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티스트의 성향이 어느 쪽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충분히 대표되지 못하고 있다 느꼈던 남부의 백인, 보수적인 컨트리 팬들은 이미 그의 노래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했기 때문이다.
단숨에 빌보드의 역사를 새로 썼지만, 올리버 앤서니는 음반사가 내건 800만 달러의 계약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지난 8월 17일 자신의 SNS를 통해 "나는 투어 버스 6대, 트랙터 트레일러 15대, 제트기, 스타디움 공연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공에 달관한 듯한 앤서니의 행보는, 오히려 이 서사의 설득력을 더욱 높였다.
남부 백인, 노동 계급의 목소리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문화의 담론을 좌우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촌스럽고, 충분히 배우지 못한 혐오주의자의 것으로 여겨졌다. 노동자의 대변자였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나 윌리 넬슨은 좌파적 가치관을 지지했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 전 민주당 대선 후보가 트럼프 지지자층에게 썼던 '개탄스러운 집단(basket of deplorable)'이라는 표현은 상징적이다.
그로부터 약 7년이 지났다. 빌보드 역사상 처음으로 세 명의 컨트리 아티스트가 빌보드 핫 100 차트의 1~3위를 점거했다. 컨트리 음악계에서 새로운 '워킹 클래스 히어로'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