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여자, 성형 수술한 여자, 인터넷 방송으로 돈 버는 여자, 남 흉보기 좋아하는 여자, 질투심 많은 여자, 자존감 낮은 여자, 아들만 감싸고 도는 여자, 종교에 미쳐있는 여자,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자, 불륜하는 여자, 거짓말하는 여자. <마스크걸>은 사랑받지 못할 여자들로 가득하다.

여성 히어로(hero, 영웅) 시대에 등장한 안티히어로(anti-hero, 반(反)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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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는 대부분 '주체적인 여성상'이 등장하는 무대였다. 꿈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스스로 쟁취하는 행보를 보였다. JTBC <닥터 차정숙>은 늦은 나이에도 의사에 도전하는 경력단절여성이 주인공이다. JTBC <킹더랜드> 주인공 '천사랑'은 학력 차별에 굴하지 않고 꿈을 이뤘으며, JTBC <대행사>에는 자수성가한 여성 임원이 등장한다.

이 주인공들은 강인했다. 걸그룹 '르세라핌'의 히트곡 'ANTIFRAGILE' 노랫말처럼 "내 뒤에 말들이 많아"도 꼿꼿한 자기애로 무장했다. 우리는 예쁘고 유능하고 선한 여성들이 "더 높이 가줄게 내가 바라던 세계 젤 위"로 비상하는 서사에 열광했다.

반면 <마스크걸> 속 여자들은 아래로 추락하는 '안티히어로'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 'Anti-Hero(안티히어로)'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태양은 똑바로 볼 수 있어도 거울 속 내 모습은 마주하기 싫어." <마스크걸> 주인공 '김모미'가 딱 그랬다.
 

한밤 중이 내겐 낮이 되어버렸어
Midnights become my afternoons

(테일러 스위프트 'Anti-Hero' 가사 中)

모미는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다. 춤추고 노래하고,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길 꿈꿨다. 하지만 예쁘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광대, 쌍꺼풀 없이 밋밋한 눈, 얇은 입술, 모미는 양지의 무대에 설 수 없었다.

그래서 모미는 음지를 선택했다. 속된 말로 '벗방 BJ'라고 불리는 일이다. 못생긴 얼굴은 마스크로 가렸다. 대신 가슴은 드러냈다. 모미는 특정 선정적인 춤을 추며 '하트팡'을 벌었다. '하트팡'이란 극중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통용되는 사이버 머니를 뜻한다. 모미가 가슴골에 우유를 흘려보내면, 더 많은 '하트팡' 후원이 쏟아졌다.

보통 드라마에서 '평범하거나 못생긴 외모' 설정으로 등장하는 여자 옆엔 멋진 왕자님이 있었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그녀는 예뻤다>, <또 오해영>은 주인공이 못생겼다는 설정인데, 상대역은 각각 현빈, 박서준, 에릭이라는 미남 배우가 연기했다.

못생겼으면 왕자님의 구원이라도 받는 것이 흔한 클리셰였다. 그러나 가혹하게도 <마스크걸>은 왕자님을 치워버렸다. 극초반, 모미가 짝사랑했던 직장 상사는 어린 여직원과 불륜 관계였다. 주오남(안재홍 분)은 '리얼돌'로 성욕을 채우는 은둔형 외톨이다. 최부용(이준형)은 데이트 폭력을 일삼았다. 왕자는 커녕 현실이라면 절대 상종하고 싶지 않을 인간 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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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은근히 자기중심적인 거 알아? 나는 남을 위하는 척 연기해 정치인들처럼
Did you hear my covert narcissism? I disguise as altruism. Like some kind of congressman
(테일러 스위프트 'Anti-Hero' 가사 中)

구질구질한 모미의 삶에 왕자를 대신할 지원군이라도 나타나길 바랐다. 모미는 유흥업소에서 춘애를 만난다. 둘은 외모 때문에 상처 받았던 과거를 공유하며 급속도로 친해진다. 아름다운 '워맨스(워먼과 로맨스의 합성어)'가 피어날까 기대될 찰나, 허영심이 일을 그르친다. 춘애는 폭력적인 남자친구에게서 몰래 도망칠 때 명품 가방을 챙기는 바람에 들키고 만다.

극 후반부는 모미의 딸인 '김미모'가 이야기의 주축으로 등장하는데, 미모의 친구 예춘이는 허언이 심하다. 지극히 평범한 아빠를 가정폭력 가해자라고 꾸며내서 '나도 너처럼 불우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며 거짓 공감대를 만든다. 둘의 우정은 순수하고 싱그러운 '하이틴' 장르가 아니다. 또래의 관심에 집착하는 솔직한 욕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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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야, 문제투성이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지
It's me, Hi, I'm the problem
Everybody agrees
(테일러 스위프트 'Anti-Hero' 가사 中)


"지 팔자 지가 꼰다"는 말이 어울린다. 춘애가 명품 가방을 포기했더라면, 예춘이가 거짓말하지 않았더라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안티히어로 편에 서는 건 쉽지 않다.

<마스크걸>은 페미니스트로서 원했던 이상적인 여성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자, 나는 이 '안티히어로'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안녕, 나도 문제투성이야. 반가워"라고. 사실 우리 삶은 유리천장을 부수는 여자보다,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여자들과 더 닮았기 때문이다.

이런 안티히어로를 응원하는 건 지치지만
 

"우리 둘은 정말 쌍둥이 같았다. 예뻐지고 싶었던 과거,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마음마저. 모미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를 지켜주는 게 꼭 나를 지키는 것 같았다."
(<마스크걸>中 춘애의 독백)

<마스크걸>은 그 밑바닥에서 서로를 지키고자 한 열등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때론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에서 사랑이 피어나기도 한다. 사랑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라 그렇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모미와 춘애, 미모와 예춘, 모미와 미모, 이들은 마스크로 가리고 싶었던 못난 얼굴을 상대에게서 발견한다. 못난 너를 사랑하는 게 꼭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서 이끌린 관계다. 모미가 딸을 구하려 했던 이유도 모성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가장 닮은 이를 지키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 춘애를 위했던 마음처럼 말이다.
 

"제 꿈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모미의 삶은 어릴 적 장래 희망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꿈도 희망도 없이 꼬여버린 삶, 그런데 사랑만은 남았다. 추녀, 성형미인, 술집 여자, 왕따. 세상은 이들을 안티히어로라 불렀지만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히어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