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마스크걸>의 한 장면.
넷플릭스
하지만 중반부부터 <마스크걸>의 성공 방정식은 독이다. 옴니버스, 피카레스크 구성은 필연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형식은 한 가지 공통 주제나 소재를 중심으로 연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여러 이야기를 엮는다. 각 에피소드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캐릭터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묘사한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서사의 연결성이 약해져서 전반적인 디테일이나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마스크걸>의 각색은 옴니버스 구성의 약점을 극대화해 버렸다. 드라마를 7부작으로 구성하면서 원작 내용은 다수 생략됐다. 특히 원작의 1부와 3부 내용에 비해 2부 분량이 대폭 줄었다. 여기에 옴니버스 구조의 특징이 더해졌다. 도입에서 결말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의 디테일이 부재하고, 모미의 행적이 매끄럽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네 번째 에피소드가 문제다. 김춘애에게 초점을 맞춘 부작용이 크다. 초반부 김모미와 후반부 김모미는 별개의 캐릭터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4화에서 처음 등장한 나나의 김모미는 둘의 가교여야 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드라마는 오히려 춘애의 과거사에 주목한다. 모미는 그녀의 인생에 잠시 끼어든 조연일 뿐이다. 춘애가 중요한 캐릭터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녀는 4화 이후 등장이 없다. 그러니 모미의 변화도, 후반부 그녀의 감정선도 부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그녀가 주오남의 아기를 낳겠다고 말하거나 경찰에 자수한 동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유추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성형 수술 전과 비교했을 때 감옥 안에서 보이는 모미의 성격이나 행동이 크게 달라진 점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극 중에서는 잠적 후 술집에서 일하기 전까지 그녀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 또 작중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모미는 외견상 전혀 임산부로 보이지 않는다.
장르적 쾌감을 잃다
덩달아 다른 문제가 파생된다. 우선 원작의 장르적 쾌감이 약하다. 따져 보면 작중 등장인물은 누구 하나 정상이 없다. 주인공부터가 악인이다. 김모미는 외모지상주의와 파렴치한 인간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 하지만 동시에 명백한 살인범이고 살인미수범이다. 주오남도, 김경자도, 김미모도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이처럼 입체적인 인간이 서로를 비난하며 물고 뜯을 때 군상극, 곧 피카레스크의 재미는 극대화된다.
그런데 <마스크걸>은 장르적 재미를 스스로 포기한다. 일례로 원작에 없는 면죄부가 모미에게 매번 주어진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그녀에게는 늘 정당한 이유가 생긴다. 그 결과 <마스크걸>은 피해자인 주인공이 인생 역경을 극복하는 흔한 감동 스토리로 귀결된다.
감독 전작을 고려하면 군상극을 포기한 결정은 의아하다. 마찬가지로 원작(소설)이 있는 군상극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는 악인들과 그들 사이에 낀 소시민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살렸기 때문. 영화는 등장인물을 '짐승'으로 비유했다. 악인들의 욕망과 비윤리적인 행동을 짐승에 빗대고, 동시에 오직 생존이 목적인 소시민들의 짐승적인 본능도 놓치지 않았다. 이를 보면 감독이 각색 능력이 없거나 극단적인 인물을 묘사하는 데 거부감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마스크걸>의 결과물에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차린 건 많은데 먹을 게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