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관객을 세계관에 가둔 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곧장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처음에는 피난 온 외부인을 막지 않던 황궁 아파트 주민들. 그러나 외부인과 다툼 끝에 화재가 발생하고 부상자가 나오자 생각을 바꾼다. 그들은 불을 끄는 데 몸을 아끼지 않은 영탁을 임시 동대표로 뽑고, 외부인들을 아파트 밖으로 몰아낸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며.
주민들의 행보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격해진다. 아파트 주변에 방벽을 세워서 아파트와 바깥세상을 분리한다. 몰래 외부인을 숨기고 보살피는 주민들도 인민재판에 넘긴다. 더 폭압적으로 변해가지만 내부의 문제제기나 비판은 허용하지 않는다. 밖에 나가서 자원을 탐색하는 작업이 약탈로 변질되는데도 이를 합리화한다. 왜곡된 사고와 집단적 폭력이 강해진다. 그 결과 유토피아는 점점 나치 독일 마냥 변해간다.
이 상황은 단지 디스토피아 속 판타지가 아니다. 현실이다. 최근 들어 아파트 단지 문은 점점 높아진다. 택배 기사나 배달원이 들어가지 못하는 건 예삿일이다. 외부인 자체의 왕래를 막는 경우도 잦아졌다. 같은 아파트 단지라 해도 급을 나눈다. 임대 아파트에 사느냐 분양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차별받는 일도 심심찮게 보도된다.
과장된 화법은 이 불편한 현실을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아파트 정비 사업을 보여 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외부인을 모두 내쫓은 뒤 주민들은 모두 순수하게 웃으며 그들의 유토피아를 즐긴다. 하지만 이 모습은 마냥 기쁘지 않다. 배경 음악 때문이다. 오페라 아리아 같은 클래식 음악은 분명 아름답지만, 형식이나 음정에서 묘한 불협화음을 내며 화면에 불쾌감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추구하는 유토피아가 정녕 아름다운 사회상인지 묻는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선도 희미해진다. 더 이상 영화 안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묻지 않는다. 현실에서 어떻게 살고 행동할 것인지 묻는다. '당신이 아파트 주민이라면 임대 아파트 주민을, 외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고. 이 영화는 사실상 현실의 거울이다.
아파트를 지키는 이유
한국에서 유독 아파트가 중시되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아파트가 사회적 계층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자산이 비금융자산에 몰려 있고, 그중에는 부동산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즉, 아파트 소유 여부는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아파트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입주민이 되면 자기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배타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작중 영탁의 존재감이 유독 두드러지는 이유다. 그는 이 모순된 열망이 의인화된 결과물이다. 급매로 황궁 아파트 103동 902호에 입주할 예정이었으나 사기를 당해 가족까지 잃은 그. 민성이 한국인이 대부분 거쳐야 하는 삶의 한 단계를 보여준다면, 영탁은 민성처럼 살고 싶은 열망을 가장 격렬하게 표출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이 캐릭터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흡인력을 자랑하고, 이병헌의 연기력도 돋보일 수 있다.
이 열망은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아파트에서 사는 삶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다. 재난 속에서 선망은 선민의식이 된다. 꿈꾸던 삶을 손에 쥐었다가 놓칠 뻔했으니, 다시 찾아온 기회를 기어코 잡으려 한다. 실제로 그는 외부인을 내쫓고 생필품을 약탈할 때 그 누구보다도 주도적이다. 다만 한계도 명확하다. 자기가 꿈꾼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그 이상향에 내포된 모순을 간과했다.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가 결국 악역인 이유다.
그래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영탁도, 그에게 동조한 만성도 아닌 명화에게 마무리를 맡긴다. 그녀는 처음부터 외부인을 포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실천에 옮겼다. 유일하게 영탁을 의심한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녀의 손을 들어준다. 수직적인 황궁 아파트와 달리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세계를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이다. 옆으로 무너진 대형 아파트가 누구에게나 삶의 터전이 되어주는 모습은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듯 보인다.
과장되거나 부자연스럽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