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MBC
MBC 사극 <연인>에 나오는 기득권층 선비들 역시 인조 쿠데타를 인조반정으로 받아들였다. 여진족이 강해졌건 아니건 간에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에게 본때를 보여야지"라며 무조건 명나라를 편드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명나라의 은혜를 모르는 광해군 정권은 패륜 그 자체였다.
조선 기득권층은 명나라와 연대해 여진족을 압박하던 체제하에서 오랫동안 기득권을 유지했다.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었던 그들은 명나라가 기울고 여진족이 떠오르는 새로운 상황에 신속히 적응하지 못했다. 조명동맹에 무조건 집착할 뿐이었다.
그들은 명나라와 계속 동맹해야 할 실리적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억지를 부렸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다시 세워준 재조(再造)의 은혜에 대해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만 반복했다.
광해군의 새어머니가 됐다가 남편 사후에 호된 시련을 당한 인목대비도 400년 전에 그런 주장을 폈다. 광해군에게 당한 과도한 탄압을 감안하면, 그가 광해군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위 교서에 담긴 그의 생각은 그 역시 낡은 기득권층의 일원이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교서에서 광해군을 후레자식으로 취급했다. 명나라와의 안보 동맹을 깼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명나라를 '천자의 조정'인 천조(天朝)로 칭하면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하했다. 임진왜란 이후로 중국 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는 선조 임금과 비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천조를 섬긴 것이 200년이 넘는다. 의리로는 군주와 신하이고, 은혜로는 어버이와 자식 같다. 임진년에 재조(再造)해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선왕께서는 40년간 자리에 계시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사대하셨고, 평생토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두 마음을 품고 오랑캐에게 정성을 베풀었으며..."
이 교서에서는 인조가 능양군으로 지칭됐다. 교서가 발표될 때까지는 공식 군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교서가 나간 뒤에 인조는 정식으로 즉위했다.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이런 일들에서 나타나듯이, 인조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나 실리외교를 비웃는 데서부터 일어났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 및 중화문명에 대한 존숭과 유목 경제권에 대한 압박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동맹이 이 정권의 외교적 기조가 됐다.
명나라가 1619년 사르후전쟁을 위해 광해군 정권에 대규모 파병을 요청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당시의 명나라는 여진족과 단독으로 전쟁하기 힘들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광해군이 실각되기 1년 전에는 명나라 황제 천계제(재위 1621~1627)가 도널드 트럼프 같은 행동을 시도한 적도 있다. 1622년에 명나라 조정은 조선에 대해 강압적 분위기를 조성해 군비를 얻어가려 했다가 실패했다. 이 정도로 명나라는 권위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며 동맹외교에 올인한 결과로 조선이 얻은 것은 튼튼한 안전보장이 아니었다. 인조시대에 발생한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과 명나라 멸망은 시대 흐름을 무시한 외교전략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묘호란의 원인이 된 '명나라의 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