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연인>의 한 장면.
MBC <연인>의 한 장면.MBC
 
정확히 400년 전인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정권은 조명동맹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꾸짖는 것으로부터 첫날 일정을 시작했다.
 
음력으로 광해군 15년 3월 12일(양력 1623년 4월 11일)에 쿠데타를 일으킨 신정권은 서궁(덕수궁)에 유폐돼 있던 인목대비의 교서를 발표해 광해군 폐위와 인조 집권을 합법화시켰다. 왕실이 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군주가 공석이 된 비상 상황에서는 왕실 최고 어른이 비상대권을 행사했다. 인목대비의 교서는 그런 상황에서 불법 세력을 합법 세력으로 세탁해주는 기능을 수행했다.
 
인조 정권은 자신들의 거사를 '정의로운 상태로 되돌린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으로 불렀다. 이를 답습해 현대 한국인들은 광해군 폐위를 당연시하는 의미가 담긴 인조반정이란 표현을 무심코 사용하고 있다.
 
'시대 흐름' 무시한 외교전략이 낳은 결과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
MBC 사극 <연인>의 한 장면.MBC
 
MBC 사극 <연인>에 나오는 기득권층 선비들 역시 인조 쿠데타를 인조반정으로 받아들였다. 여진족이 강해졌건 아니건 간에 "명나라를 도와 오랑캐에게 본때를 보여야지"라며 무조건 명나라를 편드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명나라의 은혜를 모르는 광해군 정권은 패륜 그 자체였다.
 
조선 기득권층은 명나라와 연대해 여진족을 압박하던 체제하에서 오랫동안 기득권을 유지했다.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었던 그들은 명나라가 기울고 여진족이 떠오르는 새로운 상황에 신속히 적응하지 못했다. 조명동맹에 무조건 집착할 뿐이었다.
 
그들은 명나라와 계속 동맹해야 할 실리적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억지를 부렸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다시 세워준 재조(再造)의 은혜에 대해 끝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만 반복했다.
 
광해군의 새어머니가 됐다가 남편 사후에 호된 시련을 당한 인목대비도 400년 전에 그런 주장을 폈다. 광해군에게 당한 과도한 탄압을 감안하면, 그가 광해군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위 교서에 담긴 그의 생각은 그 역시 낡은 기득권층의 일원이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교서에서 광해군을 후레자식으로 취급했다. 명나라와의 안보 동맹을 깼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명나라를 '천자의 조정'인 천조(天朝)로 칭하면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하했다. 임진왜란 이후로 중국 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는 선조 임금과 비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천조를 섬긴 것이 200년이 넘는다. 의리로는 군주와 신하이고, 은혜로는 어버이와 자식 같다. 임진년에 재조(再造)해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선왕께서는 40년간 자리에 계시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사대하셨고, 평생토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두 마음을 품고 오랑캐에게 정성을 베풀었으며..."
 
이 교서에서는 인조가 능양군으로 지칭됐다. 교서가 발표될 때까지는 공식 군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교서가 나간 뒤에 인조는 정식으로 즉위했다.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이런 일들에서 나타나듯이, 인조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나 실리외교를 비웃는 데서부터 일어났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 및 중화문명에 대한 존숭과 유목 경제권에 대한 압박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동맹이 이 정권의 외교적 기조가 됐다.
 
명나라가 1619년 사르후전쟁을 위해 광해군 정권에 대규모 파병을 요청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당시의 명나라는 여진족과 단독으로 전쟁하기 힘들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광해군이 실각되기 1년 전에는 명나라 황제 천계제(재위 1621~1627)가 도널드 트럼프 같은 행동을 시도한 적도 있다. 1622년에 명나라 조정은 조선에 대해 강압적 분위기를 조성해 군비를 얻어가려 했다가 실패했다. 이 정도로 명나라는 권위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며 동맹외교에 올인한 결과로 조선이 얻은 것은 튼튼한 안전보장이 아니었다. 인조시대에 발생한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과 명나라 멸망은 시대 흐름을 무시한 외교전략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묘호란의 원인이 된 '명나라의 조치'
 
 MBC <연인>의 한 장면.
MBC <연인>의 한 장면.MBC
 
17세기 초중반에 조선이 그 같은 수난을 겪은 것은 인조 정권의 외교정책이 유연하지 못했던 점, 후금에 이어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이 너무 빨리 강력해진 점, 명나라가 군사·재정적으로 허약해진 점 등에도 기인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측면들에도 기인한다.
 
그중 하나는 공급망 파괴다.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한 명나라의 무역제한 조치가 여진족을 더욱 도발한 측면이 있었다.
 
2021년에 <한중관계연구> 제7권 제3호에 실린 유지원 원광대 교수의 논문 '전쟁과 무역: 동북아 국제질서 개편에 나타난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지(청태종)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동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시기 후금은 만성적 경제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즉 사르후전쟁 이후 후금의 가장 중요한 젖줄이었던 명조와의 변시무역도 단절되었고, 지배 영역의 확대로 부양해야 할 인구의 증가로 경제적 부담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기술한다.
 
사르후전쟁 때 명나라 군대는 참패하고,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조선군은 의도적으로 투항했다. 광해군 폐위 4년 전에 벌어진 이 전쟁에 대한 보복으로 명나라는 여진족과의 국경무역을 중단시켰다.
 
이런 보복 조치가 여진족 경제에 끼친 영향 중 하나는 직물 수급의 곤란이었다. 김한규 서강대 교수의 <한중관계사> 제2권은 1977년에 나온 전해종 교수의 논문을 근거로 "명과의 단교로 인해 증대된 직물 등의 수요를 충족시키 위해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명나라의 공급망 파괴로 인한 직물 수급의 곤란도 정묘호란의 한 가지 원인이 됐던 것이다.
 
공급망을 끊어놓으면 살기 위해서라도 투항하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 투항을 하기보다는 더 악착같이 싸우는 쪽도 있다. 여진족은 후자였다. 이들을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명나라의 조치는 정묘호란이라는 불똥을 조선에 떨어트렸다.
 
17세기 초반에 여진족 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기후변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북방 유목민들이 중국으로 남하해 왕조를 건설한 5호 16국 시대(317~439)를 연상시키는 일이 17세기에도 있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내려갈 때는, 북쪽 지방의 목초지 감소로 유목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남하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방 국가들이 남침을 하거나 북방 난민들이 남쪽에 국가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기원전 29년 이후의 한랭건조기 속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북방의 다섯 유목민들이 북중국에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16개 왕조를 세운 5호 16국 시대도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타이완 기상학자인 류자오민의 <기후의 반역>에 따르면, 1600년부터 1720년까지는 춥고 건조한 소빙하기였다. 1670년과 1671년에 조선에서는 자연재해·전염병·기근으로 47만 혹은 140만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같은 17세기의 기후변화는 인간 건강이나 경제에 영향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여진족의 남진을 초래하는 결과로도 이어져 동아시아 질서를 크게 격변시켰다.
 
안 그래도 기후변화로 인해 남진의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여진족이다. 인조정권과 명나라의 동맹 강화에 더해 명나라의 공급망 파괴는 그런 여진족을 더욱 자극했다. 우리 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압박과 봉쇄 정책은 결국 조선에 화근이 됐다. 이런 상황이 드라마 <연인>의 저변에 깔려 있다.
연인 정묘호란 병자호란 여진족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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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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