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탁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탁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 BH엔터테인먼트

  
섬찟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대지진 후 폐허가 된 한국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한 아파트, 그리고 그 안에서 생존을 외치며 외부인과의 대결을 선포한 입주민 대표 영탁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배우 이병헌이 연기한 이 캐릭터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 현실감 때문에 영화 안에서 큰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웹툰 <유쾌한 왕따> 일부를 원작으로 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탁이 중요한 이유는 입주민들 내면에 공존하는 선함과 이기심의 분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 또한 현실 부적응자처럼 쥐죽은 살다가 아파트 주민 대표로 추대되면서, 미시 권력의 맛을 보고 급변하는 인물이다. 연기력 면에선 자타공인 최고라 할 수 있는 이병헌도 극과 극으로 치닫는 영탁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권력에 취하다
 
"출연 결정하고 엄태화 감독님과 많이 상의했다. 영탁이 그렇게 특이한 인물이 아닌,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길 원했다. 내 집 마련이 꿈이던 사람인데, 사기를 당해 큰 분노와 상실감, 우울감이 가득한 정말 불쌍한 소시민 느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감정이입이 쉽고, 이게 우리 영화의 매력이 될 수 있겠다 싶었지. 누구나 선과 악이 있잖나. 조금은 나쁜 놈, 조금은 좋은 놈 등 그런 인물이 등장하면서 갈등이 벌어지는 게 우리 영화 기본 구도다. 그러다 영탁이 극단 상황에 몰리며 하나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거지.
 
사실 극단적 연기는 배우에게도 힘들다. 경험해 본 감정을 바탕으로 할 땐 자신있게 할 수 있지만, 극단의 감정 연기는 약간의 상상을 더해야 하거든. 그래서 촬영 전까지, 촬영 후에도 불안하다. 캐릭터의 정서를 고스란히 잘 전달했는지, 혹시나 관객분들이 감정이입에 방해받는 건 아닌지. 다행히 완성된 영활 보고, 사람들 반응을 보니 그런 건 없더라."

 
가장 어려웠던 장면으로 이병헌은 영탁이 처음 등장하는 신을 꼽았다. 기괴하게 보이기도 하고, 수상해 보이기도 하는 영탁에게 관객이 호기심을 갖게끔 하는 장면이다. 아주 꼬질꼬질해 보이는 그가 입주민들 앞에 서고, 대표로서 이런저런 지시를 하며 조금씩 카리스마를 갖춘다. 이병헌은 먼저 M자형 탈모가 있는 머리를 제작진에 제안하는 등 영탁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려 애썼다고 한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머리가 좀 커진다. 분장팀과 함께 계획한 것이다. 권력이 더해감에 따라 스타일도 달라지는 거지. 눈 밑도 점점 시뻘겋게 된다. 갈수록 권력에 취해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 평생 패배자처럼 살았고, 누구 앞에 서본 적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됐고, 완장을 차잖나. 엄청난 책임이 권력이 되는데, 거기에 서툰 거지. 영탁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런 걸 반영하려 했다."
 
원작을 보진 않았다던 이병헌은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로 해석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과 사람들의 본성이 뒤섞인 아비규환 상황에서도 틈틈이 유머가 등장한다. "종종 피식거리게 하는 장면이 있는데 긴장감은 갈수록 커져간다"며 이병헌은 "그게 이 영화의 또다른 매력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제가 좋아하는 시퀀스가 몇 개 있다. 영탁이 노래 '아파트'를 부를 때 과거 장면이 나오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빠지는 것, 그리고 중간에 부녀회장(김선영)이 공익광고 찍듯 아파트 주민회를 소개하는 장면 등이다. 아주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연기하기 전 시나리오를 받아들었을 때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했다. '아, 내가 이런 장르를 좋아했었지' 새삼 다시 느꼈다. 한국영화에 꽤 오랫동안 이런 블랙코미디가 없었잖나. 후반작업이 얼마나 받쳐줄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만 놓고 보면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보통 사람의 연기
 
결과적으로 보면 이병헌의 예상보다 영화는 훨씬 늦게 개봉하게 됐다. 오는 9일 개봉함으로써 올해 여름 대작 영화 중 가장 마지막 타자로 나서게 되는 것.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코로나19 팬데믹 안에서 촬영을 마친 뒤 약 2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이병헌은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에 감독님이 후반작업에 더 공들이면서 완성도가 더욱 올라갔다"고 생각을 밝혔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기다린 거잖나. 우린 기다림의 시간같았지만, 감독님이 그간 쉬질 않았다. 계속 편집실에서 만지고 있었거든.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볼 때마다 영화가 달라진다고 하더라. 다른 배우들도 각자 입장에서 훌륭하게 연기해냈다. 솔직히 처음엔 작품이 완성되고 빨리 개봉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기다림의 시간이 영화적 힘을 더하게 했다. 아이러니한 거지."
 

이병헌은 제작사가 자체적으로 실시한 블라인드 시사(개봉 전 영화 정보를 가리고 무작위로 관객을 초대해 시사하고 설문을 받는 과정) 때 몰래 마스크를 쓰고 가봤다고 고백했다. 대형 상업영화로선 밝고 희망찬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관객 반응이 무척 궁금했다는 이유였다. 보통의 사람이 보통의 사람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과정이 특별한 게 아니다. 영탁은 바로 그 평범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이병헌이 애착을 갖기에 충분했다.
 
돌이켜보면 이병헌의 전작 <비상선언> 속 재혁도 딸의 병을 고치고 싶어 하와이행을 택한 평범한 가장이었다. 최근 작품들에서 유독 소시민을 연기하는 이병헌에게 물었다. 그의 연기 인생에서 이런 소시민 성이 또 하나의 도전이나 화두는 아닌지 말이다.
 
"일상적이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을 연기하는 게 제일 좋다. 배우는 늘 사람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직업이잖나. 어떤 사람이 왜 그런 성격, 표정을 갖는지 보고 생각한다. 물론 추측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런 관찰이 습관이 됐다. 어떤 정서든 이해할 줄 알아야 하고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 감정을 표현하는 게 재밌고, 쉽다. 그 감정이 바로 내가 가장 많이 겪어본 것이니 말이다.
 
이 영화가 재밌는 건 대화의 태도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서 대화 중 매너가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고 본다. 정말 전달하고 싶은 얘긴 30프로도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극단적 상황, 재난이 벌어질 때 내 삶의 방식이 행동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솔직하게 까놓고 인간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영화가 다루고 있다. 아파트 주민들이 나름 민주적으로 규칙을 세우고 그랬지만, 자신들의 삶의 태도에 따라 외부자들과 싸움을 택하기도 하고 심지어 내부인들끼리 갈등하기도 한다. 매 순간이 인간의 양면성을 느낄 수밖에 없는 영화라 생각한다."

 
인터뷰 말미 그가 출연하는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시즌2 이야기도 나왔다. "사람들이 계속 궁금해하셨으면 좋겠다. 아직 대본 리딩 중이고, 촬영장에 가보질 못했다"며 그가 웃어보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두고 그는 "유머가 있는데 계속 긴장이 커지고, 중간중간 툭툭 웃기는 묘한 정서의 영화"라며 관객들의 관람을 재차 부탁하기도 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탁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탁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 BH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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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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