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개>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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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9일 윤정희가 세상을 떠났다. 1960, 1970년대를 풍미했던 여배우의 죽음을 두고 고인을 추모하는 글이 적잖게 눈에 띈다. 인연으로 점철된 인생의 종점은 언제나 수많은 상념을 동행한다. 혹자는 망자를 그리워하고, 어떤 이는 고인에게 손가락질한다. 인연에 담긴 인과율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어떤 경우든 허망함과 동반자 관계다.
윤정희는 1944년 부산에서 대학교수 딸로 태어났다. 경남 밀양에서 짧은 유아기를 보낸 그녀는 광주에서 성장한다. 전남여고와 조선대 영문학과를 다녔고, 전주 우석대 사학과를 졸업한다. 그러던 차에 1967년 김수용 감독의 <안개> 주연배우로 발탁되어 영화와 인연을 맺는다. 그녀 나이 스물세 살 때 일이다. 윤정희 영화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살아생전에 300편 정도의 영화에 출연한 그녀의 활동은 1967년부터 1973년까지 7년에 몰려 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연도별로 살피면 1967년 13편, 1968년 46편, 1969년 46편, 1970년 40편, 1971년 43편, 1972년 27편, 1973년 13편인데 1974년에는 2편으로 급감한다. 여배우의 수명이 짧다고 하지만 순식간에 급전이 일어난 셈이다.
1년에 46편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요즘 기준으로는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한국 영화 중흥기라 불렸던 1960, 1970년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512편의 영화에 등장한 신성일은 1966년 45편, 1967년 50편, 1968년 48편의 영화를 찍었다. 하루에 서너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목소리는 성우들의 더빙으로 처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담으로 덧붙이면, 신성일은 훗날 아내가 된 엄앵란과 54편의 영화를 함께했다면, 윤정희와 99편의 영화에 동행했다. 그만큼 두 사람은 그 시대를 대표한 배우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37년 출생한 신성일은 1960년 <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등장했으니, 그 역시 스물세 살 나이로 영화 인생을 시작한 셈이다. 우연치고는 재미있는 우연이다.
대중가요 <안개>와 가수 정훈희
2022년 6월 개봉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여러 가지로 화제를 가져왔다. 2022년 제75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아카데미'에서도 수상할 것으로 기대됐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의 4개 부문 수상 이후 기대작이 <헤어질 결심>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본선 진출 실패로 나타났다.
<헤어질 결심>은 2022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청룡영화상,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는 쾌거를 이룬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을 구상하는 동안에 정훈희의 노래 <안개>가 창작과 완성의 모티프를 제공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안개>는 이제는 고희를 넘긴 정훈희와 송창식이 함께 부르는 노래다.
정훈희의 <안개>는 영화 <안개>의 주제가이자 주제곡으로 여러 차례 객석을 찾는다. 정훈희는 이봉조가 음악을 담당한 영화 <안개>의 주제가를 불러 열여섯 살 나이로 가수로 데뷔하여 존재를 알린다. 일설에 따르면, <안개>의 가사를 작사한 사람은 박현이 아니라, 김승옥이라는 것이다. 작사가와 작곡가 모두가 타계하여 확인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안개>의 원작은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이다. 김승옥은 1941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전남 순천에서 성장한다. 서울대 불문과에서 수학한 그는 23세인 1964년에 잡지 '사상계'에 <무진기행>을 발표하여 문명(文名)을 떨친다. 1967년 <무진기행>을 각색한 그는 1968년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으로 대종상 각색상을 받기도 했다.
원작 <무진기행>과 영화 <안개>
소설이나 희곡을 원작으로 둔 영화를 보는 관객은 환멸을 경험해야 한다. 원작과 너무도 다른 분위기와 인물과 갈등과 사건이 속출하기 때문이다. 특히 단편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이것은 필연적인 운명으로 보인다. 영화에 내재한 상업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나베 세이코 원작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좋은 예다.
<안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안개>는 1960년대 20, 30대 한국 청춘들의 방황과 무기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수작이다. 주인공 윤기준은 1953년에 끝난 한국동란 시기의 참괴함과 수치스러움을 기억하는 양심적인 청년이다. 다른 친구들처럼 그도 전장에 나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 지내야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고자 취직자리에 도전하지만, 매번 고배를 마신다. 그에게 든든한 구명의 동아줄을 던져준 이는 돈 많고 젊은 과부였다. 제약회사 사장의 딸로 남편을 여읜 여인이 그에게 성공의 뒷배가 된 것이다. 전무 승진을 앞둔 기준은 아내의 말에 따라 고향인 무진에 내려와 그곳에서 예전의 친구와 후배를 만난다.
고시 합격으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조한수, 어떻게든 무진을 떠나려는 음악선생 하인숙, 인숙을 사랑하지만 애만 태우는 후배 박 선생이 그런 인물들이다. 서울이 고향인 인숙은 짧은 순간 기준에게 마음을 열고 의지한다. 그녀는 무진의 모든 사람을 속물로 규정한다. 불과 사흘 만에 그들의 꿈같은 시간이 스러지고, 기준은 홀로 무진을 떠나간다.
<안개>가 설득력이 있는 것은 불필요한 인물이나 거추장스러운 사건을 덧대지 않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 이 땅의 청춘 군상들이 당면해야 했던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가감 없이 그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기준의 독백에 의지한다. 상업영화는 언제나 피해 왔던 수많은 독백의 활용에 힘입어 관객은 기준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무진은 어디고 어떻게 그려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