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붉은 사막> 스틸 이미지
일미디어
<붉은 사막>을 직접 영화를 보지 않고 줄거리 요약으로만 접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요즘 식으로 '천만 영화'나 '블록버스터'를 보지 않으면 지인들과의 온/오프라인 대화에서 소외될 것 같아 애용하는 별점 평가나 '패스트 무비'(유튜브에서 범람하는 10분 내외 분량의 영화 요약 소개영상)로도 온전하게 소화하긴 어렵다. '클래식'이라 흔히 통칭하는 고전 명작의 참 맛은 속성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단순 개요만 놓고 본다면 전형적인 치정/불륜물이다. 신경쇠약 상태인 주인공 쥴리아나는 초반에 남편이 코라도에게 설명해준 대로 끊임없이 기행을 벌이며 누군가에 기대려 한다. 사회성이 결여된 것처럼 쥴리아나는 문제를 해결할 의욕은 없이 자잘한 사고를 일으키고 수습에는 무관심하다. 그는 남편의 친구 코라도와 간격을 좁혔다 벌렸다 하길 거듭하며 긴장을 조성한다. 관객 누구도 쥴리아나의 다음 행동 패턴을 추리하기 힘들다. 그런 모호함이 딱히 심각한 사건이나 복잡한 복선이랄 게 없는 영화에 대한 긴장감을 지속시킨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치정/불륜 소재 영화들과 기본 얼개는 흡사하지만 그 중추에서 풍겨오는 감각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붉은 사막>에서 사건과 대사는 영화를 소화하는 데 결정적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무심한 듯 펼쳐지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불친절한 배경 묘사와 점점 관객의 심상에 퇴적되듯 쌓이는 분위기가 감독이 전달하고픈 주제에 온전히 가깝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1960년대를 기준점으로) 현대사회의 풍요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불안, 그리고 풍요의 대가로 파괴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단상을 관객에게 전달하려 한다. 마치 초월적 권능을 가진 신들이 빚어낸 것처럼 웅장하고 거대한 산업문명이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을 위압한다. 그 경이로운 산물들은 영화 내내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들을 굽어보는 듯하다. 불을 뿜는 용광로, 형형색색 연기를 피워 올리는 높은 굴뚝, 한번 봐서는 용도를 알기 힘들지만 마치 거인처럼 우뚝 솟아 범접하길 두렵게 만드는 구조물, 외계에서 온 존재처럼 홀연히 등장하는 거대한 선박들이 거듭 출현한다. 그런 배경 묘사는 자연스럽게 영화 속 공간을 인간은 이해하지도, 개입할 수도 없는 경계선, 곧 기계 신들의 영역으로 변모시킨다.
이 웅장한 산업화 시대의 표상들은 그 압도적인 권능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거기엔 인간성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공장 주변의 황무지에선 땅 속에서 불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폐기된 잔해들은 작은 산을 이루고 있다. 물가에는 두터운 기름기와 칙칙한 폐수가 둥둥 떠 있다. 심지어 공장 굴뚝에서 겉으로는 화려한 형형색색으로 오르는 연기에는 유독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가 제작된 동 시기에 2차 대전 전후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던 환경오염 문제가 오직 미장센만으로 극명하게 구현된다. 영화 말미에 쥴리아나의 아들 발레리오가 엄마에게 질문하는 내용은 영화 속 풍경을 줄곧 각인해온 이들에게 의문을 풀어주는 감독의 전언 같은 셈이다.
감독 본인에게는 최초인 컬러영화 작업에 도전한 안토니오니는 실제 색감 재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컬러영화의 속성에 구애받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실사영화라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기술력을 오로지 작가의 의도에 맞춰내 자유자재로 빛과 색을 재구성한다. 의도적으로 화면에 색감을 덧입히고 분무기로 필름에 착색을 하는 '만행'을 통해 안개 효과를 조성한다. 그렇게 일정한 이미지 왜곡을 활용해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의 이미지를 일그러뜨린다. 대사가 절제된 가운데 무성영화의 장점처럼 화면에 전시된 이미지에 관객을 온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흔히 흑백 무성영화에서 구현되는 강점이자 컬러 유성영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퇴색했다는 아쉬운 측면-숭고함이나 장엄함으로 흔히 명시되는 기운-이 <붉은 사막> 영화 속 현대 산업문명의 기계 신들 묘사를 통해 재현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의 '소외'를 표상하는 주인공의 불안
▲영화 <붉은 사막>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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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영화 속 인물들은 자주적이거나 능동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있다. 쥴리아나는 2차 세계대전 전후 재건사업이 집중된 이탈리아 중북부 산업지대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간다. 경제성장의 과실을 피부로 느끼는 입장인 것이다. (이탈리아의 남북 간 격차 문제는 이미 19세기 중반 통일과정부터 격심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이탈리아 정치 역시 지역주의가 극단적으로 강하다) 의식주에 문제가 없고 아내의 요구에 거리낌 없이 시내 목 좋은 구역에 가게터를 구해주는 남편이 있지만 쥴리아나의 삶은 행복이나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끊임없이 불안에 쫓기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과시적인 행동을 일삼고 뒷수습은 외면한다. 아이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순간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쥴리아나가 무슨 000패스이거나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지적인 능력도 충분해 보인다. 그런 주인공의 행보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예기치 않은 파급효과에 혼란을 겪는 현대 서구사회 중산층 시민의 불안한 초상을 재연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영화를 아무리 봐도 외형적으로는 쥴리아나가 영화 속에서 보이는 불안한 행태를 이어갈 이유가 관객에게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원래 감춰져 있던 인물의 연약한 심리상태가 교통사고를 계기로 개방되어 버린 것일까.
하지만 감독의 의도가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주인공의 갈증은 누구나 일생에서 갑자기 다가올 법한 권태이자 아무리 몸부림을 치더라도 채워질 수 없는 성격의 문제다. 그래서인지 쥴리아나는 끊임없이 마치 외부의 침입자처럼 도시의 해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대한 화물선을 두려워한다. 그와 동시에 그 배에 올라타고 무작정 목적지도 없이 탈주하고픈 몽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쥴리아나는 (영화 끝까지) 어떤 사안에도 온전히 결단하지 못한다. 현실에 불만족하지만 스스로는 자립적으로 뭔가에 도전하지 못한다. 그저 끊임없이 자기 말을 들어주거나 영향을 미칠 법한 주변에 자신의 혼란을 어필할 뿐이다. 그는 계속 관심과 애정을 주변에서 무한적으로 얻어내고 싶지만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도 실은 명확하게 안다. 하지만 주체적 결단이 두려운 데다 스스로 뭔가 수행해본 적이 없다 보니 권태로운 삶 속에서 그저 공황상태를 반복하는 나날만 이어갈 뿐이다. 쥴리아나는 현대사회의 겉으로는 풍요롭지만 그 안에 감춰진 실체를 무의식 중에 인지하고 불안에 떠는 서구사회 시민들의 심리를 포착하고 이를 공공연하게 전시한다.
그런 주인공의 신경증적 불안상태를 영화로 온전하게 구현하는 게 <붉은 사막>에서 감독이 도전하는 문제의식일 테다. 그 전제에 맞춰 모든 요소가 조율되고 정교하게 구조화된다. 인물의 표정과 연기, 과장된 색감과 하나의 군집처럼 합쳐지는 배경들, 신경쇠약을 재연하는 것 같은 불규칙한 소음의 향연이 각자의 몫을 분담해 소화하며 하나의 건축물처럼 완성된다. 마치 1960년대라는 시대상황이 영화에 통째로 압축된 느낌이다.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나 로베르토 롯셀리니의 <독일 영년>이 구현해낸 폐허가 된 유럽이 재건과정을 거쳐 다시 번영에 이르렀지만 그 대가로 잃어야 했던 것들, 그리고 전후 구체제가 청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내재한 실상에서 오는 피로가 안토니오니의 소외 테마 연작들을 통해 정치영화 색채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도 구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몇 년 후 68혁명으로 분출되어 나올 징후의 표현이기도 하다.
'현대성'의 어두운 이면 60년 전에 포착한 영화
▲영화 <붉은 사막>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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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막>은 무려 60년 전에 탄생한 영화이지만 바로 지금 등장했다고 해도 (일부 소품과 배경 등만 제외한다면) 전혀 손색이 없는 '현대적인' 작업이다. 영화 한 편으로 얼마나 많은 분석과 사유가 가능할 것인가 가능성의 한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해도 무방한 경지에 이른 작업이다.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위상이 얕지만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거장의 마스터피스를 이제야 어렴풋이 포착하게 될 줄이야. 세계는 넓고 우리가 발견해야 할 영화는 여전히 잔뜩 감춰져 있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 드물지 않게 확인되는 고전명작영화의 '재개봉' 열풍은 코로나19 이후 신작 개봉이 위축된 상황에서 극장가의 생존전략 중 하나로 굳어지는 중이다. 신작 영화들의 소개가 지연되는 데 일조한다는 부정적 여론도 만만찮지만, 동 시대에 해당 영화를 때맞춰 확인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늦게나마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는 2차 찬스를 제공해주는 순기능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 위주로만 활용되는 데 그치는 게 아쉬운 순간이 종종 생긴다. 그저 고전영화라 낡았다는 선입견 대신에 미지의 영화를 재발견한다는 발상으로 접근하길 권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현대성의 (긍정과 부정을 포괄하는) 예언적 이미지로 가득한 도시의 사막을 목격할 기회다.
이 영화에서 우려했던 현대사회 인간 소외현상은 인터넷과 SNS의 범람, 개인이 어찌할 도리를 찾지 못하는 톱니바퀴 같은 시스템에 질곡 당한 지 오래인 21세기 관객에게 더 진하게 다가설지 모르겠다. <붉은 사막>은 제목처럼 모험심 많은 관객에게는 우리 시대의 진실을 파헤칠 가능성을 잔뜩 품은 채 열쇠를 갖고 다가오길 기다리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작품이다. '현대성'의 외면하고픈, 하지만 엄연한 단면을 일찌감치 포착해 타임캡슐처럼 저장해놓은 작업을 확인할 때다.
<작품정보> |
붉은 사막 Red Desert, Il Deserto Rosso
1964|이탈리아/프랑스|드라마
2023.07.26. 개봉|117분|15세 관람가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각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토니노 구에라
주연 모니카 비티(쥴리아나 역), 리처드 해리스(코라도 젤러 역),
카를로 치오네티(유고 역)
수입/배급 일미디어
1964 2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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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친구 아내와 불륜, 거장이 그 뒤에 숨겨놓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