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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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근친혼의 저주, 세계를 제패한 합스부르크 가문' 편을 통하여 유럽의 역사를 주도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흥망성쇠를 조명했다. 문예학자인 라영균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통변역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선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0-11세기 경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출발점은 스위스 알프스 산맥 인근의 아르가우 지역이었고, 이때만 해도 인근의 다른 가문들보다도 규모가 영세한 말단 시골 귀족 가문에 불과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신성로마제국(962-1086)의 영역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지금의 독일 일대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영토의 일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여러 공국과 제후, 영주들이 봉건적 위계질서를 형성한 국가 연합체였다.
12-13세기에 접어들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급상승했다. 합스부르크는 알프스 산악과 평원 지대가 교차하는 지형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영지를 지나는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받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정치감각이 탁월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력한 제후와 성직자들의 입김이 강하여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연방체제에서 황제의 편에 서서 정적들과 맞섰고, 황실 및 명문가들과의 정략 결혼을 통하여 유력가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1273년, 합스부르크는 가문 최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루돌프 1세(1218-1291)를 배출하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루돌프 1세가 즉위하기전 신성로마제국은 20여년간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 된 대공위 시대(1254-1273)의 혼란에 빠져있었다. 황제투표권이 있는 가문과 교회는 서로를 견제하느라 새 황제를 선출하는데 눈치만 보기 바빴다. 제국을 대표할 정치적인 지도자가 부재한 신성로마제국은 주변국의 침입에 노출되며 위협에 시달렸다.
결국 제후들은 고심끝에 정통성은 있지만 그 세력이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합스부르크 가문을 대안으로 추대하게 이른 것. 즉위 당시 루돌프 1세가 이미 55세로 당대로서는 엄청난 고령이었다는 것도 추대에 한몫을 했다.
그런데 루돌프 1세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반란세력들을 토벌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며 제국의 영역을 넓혔다. 오스트리아 지역을 차지한 루돌프 1세는 아들에게 공작 작위와 영토를 하사했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근거지를 옮겨 600년에 걸친 통치를 이어가면서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가문'으로 불리우는 출발점이 된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합스부르크가에 첫 위기가 찾아온다. 루돌프 1세의 뒤를 이은 알브레히트 1세가 조카에게 암살당하면서, 제위는 룩셈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간다. 합스부르크가는 영지가 여러 개로 분열되고 제위 계승에서 배제되며 한동안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또한 합스부르크가는 황제 선출의 투표권을 지닌 제국의 7대 핵심 제후 세력이었던 '선제후'에서도 배제되며 가문의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에 합스부르크가는 대담하게도 과거 황제의 서신에서 '오스트리아 대공작의 지위와 선제후에 버금가는 각종 특권들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위조하여 신성로마제국에 제출했다. 훗날 이러한 위조사실이 밝혀진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19세기 이후였다. 합스부르크가는 이를 바탕으로 선제후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고, 위조 문서에 언급된 것처럼 실제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합스부르크가는 근거지인 빈을 문화예술의 중심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빈의 랜드마크가 된 슈테판 대성당 증축,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빈 대학교의 설립, 예술가와 음악에 대한 후원으로 하이든, 베토벤, 모차르트 같은 거장들이 이 시기에 모두 빈으로 모였다. 이 시기 빈은 파리, 피렌체와 함께 유럽 문화에술의 메카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비록 정치적 의도와 위조라는 어두운 면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셈이었다.
또한 합스부르크가는 대외적으로 세력 확장에도 적극적이었다. 합스부르크가는 기독교 진영의 최전선에서 오스만 튀르크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앞장섰고, 흩어졌던 영지들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러한 합스부르크가의 세력 확장에 빼놓을 수 없는 수단이 바로 '결혼 정책'이었다. 알브레히트 2세(1397-1439)는 142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외동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고 1438년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합스부르크가로서는 알브레히트 1세 이후 130년 만에 다시 황제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었다. 이 시기 합스부르크가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의 상속녀 엘리자베트의 영토까지 획득하며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연이어 황제들을 배출하며 권력을 공고히 다졌다.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프리드리히 3세(1415-1493)는 'A.E.I.O.U'라는 문구를 성벽이나 도시 곳곳에 세웠는데 이는 'Austria Est Imperatrix Ommis UniversI (오스트리아는 전세계의 통치자다)'라는 뜻의 줄임말이었다.
합스부르크가의 결혼정책은 후대에도 이어져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는 프랑스의 명문가인 브르고뉴 공주 마리, 부르타뉴 공국의 안과 연이어 정략 결혼했고, 아내들이 상속받은 땅을 그대로 흡수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가 석연찮은 낙마사고로 요절하자마자 얼마지나지 않아 재혼을 추진했고, 안과의 두 번째 결혼식때는 헝가리와의 전쟁중으로 직접 참석할수 없게 되자 대리인을 보내 혼인을 강행했다.
이러한 결혼 정책이 매번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국왕 샤를 8세는 막시밀리안 1세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여 장인과 사위 관계였지만, 합스부르크가 부르타뉴를 공짜로 차지한 데 대한 불만으로 마르게리타와의 혼인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어 1491년에는 전쟁을 일으켜 부르타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안과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는 돌이킬 수 없는 앙숙 관계가 된다.
한차례 쓴 맛을 봤지만 막시밀리안 1세는 좌절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강력한 결혼정책을 추진했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스페인 왕실과 헝가리 왕실에 손을 내밀고 자신의 후손들을 연이어 이중결혼시키며 겹사돈을 맺었다. 결혼 이후 운명의 장난처럼 스페인-헝가리 왕실의 상속자들이 줄줄이 사망하거나 통치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서 자연히 그 상속권은 합스부르크가에게 잇달아 넘어갔다.
헝가리 왕 코르비누스는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지만,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너는 결혼을 해라"는 어록을 남기며 합스부르크를 비꼰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도 합스부르크의 결혼정책을 비판하는 표현으로 자주 인용되기에 이른다. 중세 시대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짧았고 가문의 대를 잇는 출산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이는 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와 인연을 맺은 가문들마다 연이어 석연치 않은 비극을 맞이하자 음모론이 양산된 것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합스부르크가는 결혼정책을 통하여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일대와 아메리카까지 아우르는 '해가 지지않는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펠리페 1세와 스페인 공주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 5세(1500-1558)의 시대에 이르러 합스부르크의 군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스페인 국왕을 비롯한 무려 20여 개의 직함을 가졌을 정도였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합스부르크의 다음 목표는 광대한 영토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결혼정책으로 누구보다 큰 수혜를 누렸던 합스부르크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문의 혈통이 끊기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이 바로 '근친혼'이었다.
'근친혼'의 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