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 라이프> 스틸 이미지
엠엔엠인터내셔널㈜
하지만 정작 타에코의 매번 결심은 (결과가 최악이라 그렇지) 고귀하고 이타적인 헌신에서 비롯되는 성격의 것들이다. 반면에 그런 결정으로 인해 피해를 보거나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이 혼란에 빠지는 주변 인물들 또한 빌런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선량하기까지 한 존재들이다. 남편 지로가 후반에 보이는 문제도 아내가 자신에 대해 소홀하고 전남편과 이해하기 힘든 행각을 벌이기 때문에 가깝다. 시부모들이 모진 말로 상처를 주긴 하지만 입장 바꿔놓고 보면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 가능하거나 편을 들 법도 한 내용들이다. 각자의 개별적 상황은 모두 충분히 수긍 가능하거나 최소한 이해는 되는 지점들이다.
유일하게 이 영화 속에서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건 타에코의 심리와 박의 행태다. 그렇다면 타에코는 값싼 동정심에 자신을 맡기는 불장난에 빠져든 존재고 박은 그저 타에코를 착취하는 데 맛을 들인, 소수자 정체성을 팔아먹는 존재인 걸까.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둘을 규정하지 않는다. 한길 사람 속 알 수 없듯이 그 미묘한 간극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예측불가능성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어떤 각성의 단계로 관객을 몰아붙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타에코에게 외부 세계는 두 갈래로 잔혹하다. 그 압축은 영화 초반에 바로 튀어나오는데 타에코를 대하는 시부모 각자의 언행에서 촉발된다. 시아버지는 원래 점찍어둔 며느릿감 대신 갑자기 등장해 아들의 안정된 진로를 가로막은 며느리가 맘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결혼한 지 1년된 상황에도 며느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남편을 달래고 어르며 불화를 중재하는 게 시어머니의 몫이지만, 그 또한 일단 벌어진 상황 수습하는 게 우선이다 보니 내심을 간혹 드러내고 만다. 케이타를 겉으론 친절하게 대하지만 진짜 손자도 안겨달라는 요구에 타에코는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 표정이다. 타에코의 고난과 본의를 누구 하나 온전히 소화하고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남편 지로조차도. 하지만 애초에 세상이란 그런 것이라는 무심한 메시지가 아마 감독의 본심일 테다.
현대 일본사회 조명하는 동시대 봉우리 중에도 특출한
번영의 끝에 서 있던 19세기 말 제국주의 유럽의 좋았던 옛 시절('벨 에포크'라 불리던 바로 그 시간)에 그런 서구문명의 허구와 위선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로 은유하던 자연주의 문학의 전통을 활동사진으로 되살려내는 것 같은 느낌이 농후하다. 문학적 전통의 이미지 재현에 더해 키타노 다케시, 미이케 다카시, 이상일 등 당대 일본영화계 거장들과 협연하며 <하나비> <오디션> <박치기> <훌라걸스> 등에서 다채로운 인상적 장면들을 담아냈던 명 촬영감독 야마모토 히데오의 솜씨가 화룡점정을 이룬다. 극도로 절제된 톤으로 카메라에 담긴 이미지들은 그 하나하나가 정교한 미장센을 완성하며 상징으로 가득 채워 넣은 정물화처럼 기능한다. 종종 영화를 멈추고 정지화면으로 음미하고플 정도다.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가 도쿄예술대학에서 키워낸 제자이자 영화적 동료로 우리는 하마구치 류스케를 첫손에 떠올리지만 실은 후카다 코지 역시 그 반열에 속한다. 그리고 둘은 앞서거니 뒤에 서느니 거듭 반복해가며 일본영화계 작가주의 계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일본사회의 변화를 변주한다면 후카다 코지는 겉으론 장기 번영중인 일본사회의 연약한 틈새를 메스로 헤집는다. 이 라이벌 관계가 향후 얼마나 풍요로운 유산으로 남게 될지 또한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될 테다. 이 둘에 최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국내 개봉했던 미야케 쇼 등 동 세대 재능 넘치는 소장파 감독들의 경쟁은 근래 침체일로인 한국영화계에 비교되며 일본영화의 저력을 입증하는 예시이기도 하다.
특이하게 <러브 라이프>에는 한국과 수어가 소통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다루기 위해 주요한 코드로 활용된다. 하지만 돌출적인 등장이라기보다는 감독의 전작들에서 지속적으로 천착해온 복잡하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세계의 이면과 불규칙성을 다루는 요소로 변주되는 느낌이다. 수어지도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와 동일한 전문가가 수고해 한일, 남녀, 연령대별 수어의 미묘한 결을 표현해낸다. 보는 시각에 따라 본 작품에서 장애인에 대한 묘사는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동 시대 일본영화 차기 거장들이 일관되게 장애 문제에 분량을 할애하는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본 작품에서 타에코로선 재앙의 근원이라 할 전남편 '박'의 캐릭터를 놓고 별 의미 없는 노란이 펼쳐지는 상황이긴 하지만, 감독이 내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저 '타자'이자 '이방인' 설정에 적절했기 때문에 활용된 것이라는 해명에 기울어지는 편이다. 우리가 인접국, 특히 북한을 상상 속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차용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활용법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프닝이다.
미래의 거장으로 기록될 감독의 작품세계를 응원하며
▲영화 <러브 라이프>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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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징후로는 <하모니움>이, 아이러니한 사건은 데뷔작인 <환영합니다>가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반복보다는 심화에 가까운 질감과 깊이를 <러브 라이프>는 구현한다. 연륜이 쌓이면서 갈수록 진화되는 세공, 그리고 롱 테이크와 공간감각을 절묘하게 조합하는 미장센을 통해 주인공의 지독한 고립과 인생의 우연성,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지를 후카다 코지는 지속적으로 소화해낸다.
물론 <러브 라이프>는 데우스 마키나 식으로 뜬금없는 인간찬가로 귀결되진 않는다. 낙관과 희망을 철 지난 유행가처럼 안일하게 반복 노래하는 섣부름은 후카다 코지의 작품세계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주인공들은 서로 배신하고 버리고 버림받으며 상대의 호의를 조금씩 배은망덕하게 되받아낸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순전한 악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인과 악인의 경계란 실제로는 종이 한 장 차이이기 쉽다는 것을 이만큼 진하게 담아내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여전히 후카다 코지의 영화는 차분한 척 위장하지만 핏자국처럼 선연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으로 뇌리에 남는다. 마치 타에코와 지로 부부가 행복의 절정에 오르던 순간에 아무도 모르게 터진 참극의 현장과 비행기 구름이 무심하게 흘러간 그림 같은 파란 하늘의 대비가 관객의 심장에 대못을 박듯 말이다. 그냥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인 매 장면 하나하나가 뜯어보면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작품 속 감춰진 행간의 의미처럼 활용되기에 영화를 곱씹어볼수록 그 진폭은 배가된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국내에선 하마구치 류스케나 미야케 쇼에 비해서도 과도하게 묻혀진 감이 있어왔던 후카다 코지의 영화세계가 보다 폭 넓게 조명되는 계기로 <러브 라이프>가 분기점이 되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단순히 냉소적인 세계관이라 단정할 수 없는 예리한 시야와 너른 조망이 그의 영화 속에서 점점 퇴적되며 하나의 지층을 이루는 과정을 실시간 목격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또한 감독의 작품 속 펼쳐진 세계가 영화 속에서 타에코가 바다를 건너 한국에 상륙하듯 어느새 우리 주변에서도 일상적으로 관측되는 풍경이기에 더욱 시사점이 큰 지형도에 주목할 가치는 충분하다.
<작품정보> |
러브 라이프 LOVE LIFE
2022|일본/프랑스|드라마
2023.07.19. 개봉|123분|12세 관람가
감독 후카다 코지
주연 키무라 후미노(타에코 역), 나가야마 켄토(지로 역), 스나다 아톰(박씨 역)
출연 야마자키 히로나, 칸노 미스즈, 타구치 토모로오
촬영 야마모토 히데오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2022 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2022 47회 토론토국제영화제
2022 27회 부산국제영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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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