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썬>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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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로 이미 대단한 성공을 이미 거둔 감독은 희곡에서 영화로 활동영역을 확장하는데 도전한다. 그 첫 순서로 자신의 대표작 '가족 3부작' 시리즈를 차례로 영화화하는 중이다. 이 가족 시리즈는 3부작으로 구성된다. 2010년 「어머니」 - 2012년 「아버지」 - 2018년 「아들」로 이어지는 연작을 통해 작가로서 현대사회의 인간군상을 각각 장년기-노년기-청소년기로 나누고 이를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성공적으로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미 연극으로 성공을 거둔 이 연작은 이제 새로운 각색을 거쳐 차례로 영화화 진행 중이다.
희곡 연작 탄생 순번과 영화화 순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희곡은 엄마 ⇒ 아빠 ⇒ 아들 순서이지만 영화화는 아빠 ⇒ 아들 ⇒ (엄마) 순서로 진행되는 중이다. 원 3부작 순서와 달리 '엄마' 편이 대단원의 마무리가 되는 셈이다. 물론 원작에서도 세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배경으로 진행되지만 크게 묶어보면 세계를 이루는 각자의 단면처럼 읽혀진다. 현대사회에서 그 비중이 꽤나 약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혈연으로 결속된 원초적 공동체인 가족이라는 소우주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 내밀한 밀폐공간 속에서 표현되는 심리묘사의 무게감과 밀도를 이용해 희곡과 영화 모두 현대가족 풍속도를 그려낸다. 고도로 추상화된 가족 구성원 개별 군상이 매 작품마다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소우주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더 파더>는 성공적인 인생을 거쳐 황혼에 접어든 주인공이 치매에 걸려 무너져가며 벌이는 몸부림과 함께, 치매 당사자를 돌봐야 하는 주변 가족과 돌봄 종사자 인력의 관계 및 심리묘사에서 현존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후속에 속하는 <더 썬> 또한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이혼가정의 방황하는 청소년 재현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전작에 비해 뭔가 약하다는 평판을 듣게 된다면, 두 작품의 설정축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테다. 단순비교로는 곤란한 핸디캡을 <더 썬>은 필연적으로 지니기 때문이다.
<더 파더>는 주인공 '안소니'(원작은 '앙드레') 역할을 맡은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혼신의 연기를 펼치면서 명예와 지위를 겸비한 주인공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장절하게 그려낸다. 거기에 올리비아 콜만 등 안소니 홉킨스에 맞상대가 가능한 연기파 배우들이 마치 무협지에서 화려한 무공초식을 교환하듯 한바탕 벌이는 연기대결이 불꽃을 튀긴다. 그럼에도 영화의 시점은 심리 스릴러처럼 치매로 과거와 현재를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의 심경을 단일 중심축으로 풀어나간다. 그런 골격 덕분에 관객은 압도적인 연기에 실린 당사자의 안타까운 몰락을 당사자에 감정이입하며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후속 작품인 <더 썬>은 결국 온전한 이해에 도달 불가능해 보이는 시한폭탄 같은 아들 니콜라스(원작에선 '니콜라')의 상태가 갈등과 긴장의 핵심을 이룬다. 반면에 관객이 몰입하게 되는 대상은 아버지 역할을 고민하는 피터(원작 이름은 '피에르')에게 맞춰진다. 그 때문에 발생하는 시선의 분산이 집중력과 몰입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제약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의 리얼리티 확보에서 감수해야 할 몫이다. 감독 또한 자신이 원작의 아들 캐릭터를 그저 자신의 개인적 경험담을 재연하는 존재로 풀어내려 하지 않는다. 40살 가까운 나이에 집필한 원작이 현재의 청소년 문제를 온전히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다. 대신에 그런 위기의 청소년 당사자를 둘러싼 가족의 고뇌가 보다 작가의 포지션에 적절하다는 판단이 확고히 서 있다.
영화 속 가족에서 '금쪽이' 논쟁을 떠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