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꽃선비 열애사>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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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폭군인 조선 연산군은 드라마 속의 이창보다 훨씬 쉽게 권좌를 내줬다. 연산군을 실각시키고 중종을 옹립한 1506년 중종반정은 매우 싱겁게 성사됐다. 물론 반정 자체는 치밀하게 준비됐다. 하지만 연산군이 폭군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의 몰락은 의외로 싱거웠다.
중종반정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한 음력으로 중종 1년 9월 2일자(양력 1506년 9월 18일자) <중종실록>은 정2품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이 반정 세력을 이끌고 창덕궁으로 나아가던 전날 밤 11시경 상황을 묘사한다. "문무백관과 군인·백성들이 분주히 달려와 거리를 메우고 길을 막았다"라고 전한다.
반정세력이 정부군에 쫓기고 있었다면, 한성부(한양은 별칭) 주민들이 한밤중에 거리로 쏟아져나와 한가롭게 구경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연산군 조정의 샐러리맨인 문무백관들 역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정군이 몰려온다는 소문은 도성 백성뿐 아니라 궁궐 병사들까지 동요시켰다. 폭군 이창에게 비교적 의리를 지킨 <꽃선비 열애사> 속의 궁궐 무사들과 달리, 연산군을 지키던 군인들은 임금을 내팽개치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궐내에 입직한 여러 장수들과 군사, 도총관 민효증 등은 변을 듣고 궁궐 도랑의 수채 구멍으로 먼저 나갔다"라고 위 실록은 말한다. 군주의 경호 무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 사명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연산군을 보좌하던 입직 승지들도 마찬가지였다.
궁궐 곳곳의 대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달랐다. 이들은 수채 구멍으로 기어나가지 않고, 담장을 뛰어넘어 달아났다. 그래서 "궐내가 텅 비게 됐다"고 실록은 말한다.
'텅 비다'에 쓰인 한자는 일공(一空)이다. '텅 비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하늘의 창공을 가리키기도 하고, 만물은 공(空)이라는 불교 교리를 설명할 때도 쓰이는 글자다. 궁궐이 얼마나 말끔하게 비워졌으면 이런 표현을 썼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