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구미호뎐 1938>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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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배경인 1930년대는 본격적 형태의 미인대회가 나타나던 때였다. 일본이 만주사변(1931.9.18)을 도발하기 2개월 전에 발행된 1931년 7월 20일자 <조선일보>에 '미쓰조선'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이 주최하는 미스조선 선발대회를 소개하는 이 기사는 "대판매일신문사(大阪每日新聞社)에서는 미쓰조선이라 하야 조선에 사는 미혼 녀자로 가장 잘생긴 사람 두 명을 일본인측 한 명, 조선인측 한 명씩 뽑으리라 한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1차로 한국인 10명과 일본인 10명을 뽑은 뒤 최종적으로 한국인·일본인 각 1명을 미쓰조선으로 선발하게 된다고 전했다. 조선에 거주하는 한·일 각 1명을 공동 미쓰조선으로 선발했으니, '내지와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 이념을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지원자의 직업에 제한을 뒀다. "후보 자격은 기생이나 배우, 음식점 작부가 아닌 미혼 녀자"라고 기사는 전했다. 예능인에 가까웠던 기생을 포함한 몇몇 직업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조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또는 기생이나 배우 중에는 유명인들이 많으므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미쓰조선으로 선발하겠다는 의도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1931년 그해에는 대중 잡지 <삼천리>를 발행하는 삼천리사도 미인대회를 열렸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로 시작하는 '국경의 밤'과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로 시작하는 '산너머 남촌에는'을 지은 시인 김동환의 출판사도 이런 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머지않아 친일파로 변모하게 될 김동환의 회사가 주관한 이 대회의 당선자는 '삼천리일색'(三千里一色)으로 불렸다. '미쓰 코레아'라는 호칭도 함께 사용됐다. 이 대회에서 특선으로 뽑힌 사람은 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졸업한 최정원이라는 18세 여성이었다. 일본 신문사에 의해 뽑힌 미스 조선과 달리 국내 출판사에 의해 선정됐으므로 최정원이 실질적인 한국 최초의 미스코리아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인 겸 간호사로 활동한 최정원은 3년 뒤인 1934년에 <낙동강>이라는 첫 소설을 발표해 또다시 주목을 끌었다. 낙동강 유역 소작인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이 작품은 소설가 장혁주로부터 '완벽한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 당시 표현을 빌리면 '완벽한 리아리씀 혹은 리아리즘' 작품으로 평가된 것이다.
그해 11월 1일자 <삼천리> '최정원씨의 낙동강을 읽고'에서 장혁주는 "최정원씨의 수법은 완벽한 리아리씀이다"라며 "이것이 아직도 나어린 여성의 손으로 된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것인가?"라고 칭송했다.
넉 달 뒤인 1935년 3월 5일 발행된 <동아일보> '최근 문예논평 4'는 "완벽한 리아리즘이라고 경탄한 장혁주씨의 소개문은 좀 과장된 점이 있어"라고 하면서도 "신춘문예 작품 제일류에 속해서 마땅할 것이라 생각하였다"라며 "특히 묘사 수법에 잇어 간간 보여준 교묘한 필치는 이 작자의 뛰어난 재질을 엿볼 수가 잇엇다"라고 호평했다.
최정원은 삼천리일색이 된 지 3년 뒤에 소설을 발표해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스코리아가 된 1931년에는 과연 적합한 사람인가 하는 부정적 시선도 받았다. 비난에 가까운 혹평이 그해 10월 10일자 <조선일보> '10월 잡지평 1'에 실렸다. 이 기사는 3주년 기념인 <삼천리> 10월호의 분량이 많은 점을 지적하면서 이 잡지에 발표된 삼천리일색 최정원에 관한 악평을 내놓았다.
"3주년 기념호이니만치 페지 수(數)도 만타. 첫머리에 삼천리일색 미쓰코레아가 발표되엿다. 전 조선을 모와노흔 미인이오. 조선의 문인·화가·무용가의 제(諸)권위들의 엄선한 것이나, 1등 당선된 여자는 나의 보기에는(감상안이 저급해서 그런지 몰나도) 미쓰코레아란 말만 하기도 미안스럽다. 조선에 그러케 미인이 업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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