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꽃선비 열애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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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사극 <꽃선비 열애사>는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왕위를 찬탈한 이창(현우 분)은 잔인무도한 폭정을 일삼는다. 인명을 아무렇게나 살상한다. 그의 관심은 세상의 안위 같은 데는 없어 보인다. 오로지 왕위를 유지하는 데만 급급해 보일 뿐이다.
국가 지도자를 도저히 좋게 봐줄 수 없는 이런 상태를 가리켜 조선시대 사람들은 '종묘사직이 위태롭다', '나라가 망하게 됐다'라고 표현했다. 세상이 이렇게 됐다고 판단되면, 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선비들이 가장 먼저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 드라마에서 폭군 이창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선비들이다. 이들은 비밀결사 목인회를 결성해, 금서로 지정된 서책을 함께 읽으며 임금을 탄핵할 계획을 수립한다. 백색 도포에 갓을 쓴 선비 수십 명이 은밀한 데 모여 거사를 논의하는 장면이 이 드라마에 몇 차례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책만 읽던 선비들이 정변을 결의하는 장면은 군인들의 쿠데타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위험하게 비쳐질 수도 있다. 창칼이 아닌 붓을 든 유생들이 정변 계획을 세우는 것은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선비들의 정변에 무관이 끼어 있는 모양새
고려 제4대 주상인 광종이 958년에 과거제도를 시행한 이래, 고대 사회의 엘리트인 무사들의 권위는 점차 약해졌다. 그 대신, 문신 우위 체제가 조정과 군대를 포함한 각 방면에 서서히 확대됐다. 212년 뒤인 1170년에 무사들이 차별 구조에 항의하며 무신정변을 일으킨 것은 그 2백년 동안에 문신들의 지위가 크게 제고됐음을 보여준다.
1019년 귀주대첩의 명장인 고려시대 강감찬은 문과시험 장원급제자였었다. 4군 6진의 하나인 6진 설치의 주역인 조선시대 김종서 역시 문과시험 급제자였다. 이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광종의 과거제 시행은 무신이 아닌 문신이 군대까지 총지휘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문신 사령관 옆에 무신 참모가 있기는 했지만, 문신이 군대를 통솔해야 한다는 관념이 광종 이후에 계속 확산됐다.
우리 시대 같으면,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하는 자리에 학자 출신 브레인 한두 명이 끼어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다. 문신 우위 체제가 견고했던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문신이나 선비들이 정변을 모의하는 자리에 무관들이 끼어 있는 게 훨씬 자연스러웠다.
고려 광종 이후의 변화에 더해, 선비들의 정변을 수월하게 만드는 사회·경제적 요인도 있었다. 상당수 선비들은 노비와 토지를 보유한 지주가문의 일원이었다. 노비를 많이 보유한 양반 지주들이 임진왜란 의병장이 되는 사례가 많았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노비가 많은 집안의 선비들은 경우에 따라 사병부대 지휘자로 변모할 수도 있었다.
정부군도 선비 출신 문신들의 지휘 하에 있었고, 민간 사병부대도 기본적으로 선비들의 지휘하에 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에게는 무사가 아닌 선비가 반란을 계획하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꽃선비 열애사>에 묘사된 선비들의 정변 모의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반역을 꿈꾸는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들이 반역자라는 인상을 풍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성군이든 폭군이든 임금을 거역했다는 불충의 딱지가 붙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그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정치 용어가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인조 쿠데타)에 사용된 반정(反正)이란 단어다.
제자 공손추가 "군주가 어질지 못하면 정말로 몰아낼 수 있는 겁니까?"라고 질문했다. 맹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맹자> 진심(盡心) 편에 따르면, 맹자는 "이윤(伊尹)의 정신이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이윤의 정신이 없다면 찬탈이 된다"고 말했다.
임금인 태갑(太甲)을 하아시켰다가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자 3년 만에 복권시킨 은나라 재상 이윤의 정신을 갖고 있다면 폭군 방벌도 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다른 마음이 아니라 불의를 몰아내려는 마음이 있다면 폭군 방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도한 정변도 맹자가 말한 폭군 방벌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 선비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폭군 방벌로 불리기보다는 반정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박정희와 달랐던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