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비' 이송희일 감독 영화 <제비>의 이송희일 감독이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시네마달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비>는 사랑을 꿈꾸는 1983년의 혁명가와 프락치,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현재를 살아가는 그녀의 그 시절 로맨스 작품이다. 12일 개봉. ⓒ 이정민
최근까지 SNS에서 환경 및 기후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왔던 그가 오랜만에 신작 영화로 관객과 만나는 중이다. <야간비행>이 2014년 개봉이니 햇수로 약 9년 만이다. 소재 또한 그간 감독이 천착해왔던 것과 변화가 있었다. 지난 12일 개봉한 영화 <제비>는 다름 아닌 1983년 독재 정권 때 자행된 이른바 '녹화사업'과 그 이후 세대가 현실을 살아가며 애써 외면해왔던 가족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서울 대학로 인근에서 13일 오후 이송희일 감독을 만났다. 개봉도 개봉이지만 영화 관련 언론 인터뷰도 약 9년만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기도 했고, 각종 강연과 또 새롭게 촬영한 영화 작업으로 바쁘게 살다가 맞이한 개봉이라 좀 얼떨떨하기도 하다"며 그가 소회부터 전했다. <제비> 또한 2019년에 촬영, 2021년에 편집을 마쳤지만 개봉 시기를 잡지 못하다 이제야 빛을 보게 된 상황이었다. "상업영화들 중 창고에 묵힌 영화가 100여 편이라는데 이렇게 개봉하게 된 게 감사한 일"이라며 그가 덧붙였다.
여성들의 활약을 강조하다
제목인 제비는 말 그대로 영화 속 학생 운동 리더 격인 한 인물의 별명이다. 배우 윤박이 맡은 제비는 그 시절 치열하게 독재 정권에 항거하던 운동권을 상징한다. 영화는 결정적인 순간 제비를 배신한 동료 현수(유인수), 그리고 제비의 연인이었지만 그의 사망 후 인수와 가정을 꾸린 은숙(장희령), 그리고 이런 부모의 삶을 외면해 오다 정작 아내와 이별 위기에 놓인 아들 호연(우지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따지고 보면 1987년 6월 항쟁이 기성 영화에 소환된 것에 비해 1983년 학생운동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게 사실이다. 감독은 탄핵 정국 이후 2017년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직후 어떤 갑갑증을 느끼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거 이야기보단 현재 상황을 말하고 싶었다. 민주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지만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은 느낌이 들어 1980년대 이야기로 풀어가려 했다. 장르적으로 긴장감을 주기 위해 프락치(첩자)를 설정했는데 실제 제 개인 경험이 반영돼 있기도 하다. 90학번으로 저도 학생 운동하다가 프락치로 몰렸던 적이 있거든.
녹화사업을 중심으로 쓰다 보니 참고할 작품이 거의 없더라. 의문사가 속출했던 때인데 당시 사망자 숫자도 제대로 합의가 안 되고 있다. 당시 학교를 다닌 선배들을 알음알음 만나 인터뷰했다. 군대에 끌려가기 싫어 실제로 발목을 부러뜨린 사연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잘 반영하는 과정이었다."
소재만 놓고 보면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 1987 > 같은 영화와 비교될 여지도 있다. 87년 6월 항쟁을 다루고 있지만 현실에 어떤 화두를 던지려 한 의도는 세 작품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이송희일 감독은 "다만 (민주화 항쟁 소재인) 그 영화들을 볼 때 거리감이 들었다"며 "왜 당시를 박제화할까 싶었다. 여전히 운동하시는 분도 많고, 자괴감을 안고 사시는 분도 있다. '87혁명'이 미완이기도 했는데 승리감에 도취한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라고 말을 이었다.
"승리감에 취해 훈장처럼 과거를 묘사하거나 그때 당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박제하는 건 똑같다. 제 경우엔 과거와 현실이 서로 부딪히며 오는 영향에 집중했다. 발터 벤야민이란 철학자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말한 두 문장을 시나리오 쓸 때 붙잡았다. 하나는 '호랑이의 도약'이라는 말인데 우리 기억은 누적되고 점진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호랑이처럼 어느 순간 도약한다는 의미다. 현재와 과거가 그렇게 중첩돼 있다는 생각으로 소재에 접근했다.
다른 하나는 누구나 깊은 지하실을 갖고 있다는 표현이 있다. 그래서 등장인물마다 각자의 지하실을 할당했다. 저마다 비밀이 있다는 걸로 접근했는데 영화에선 예산이 부족해 현수에만 회사 밑 지하실이 있다는 설정을 넣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사를 다루게 됐다. 가장 애착관계인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질 거라 생각했거든. 한국사회가 압축성장을 하다 보니 사이사이 역사적 망각이 있는 것 같았다. 부모 세대가 바로 얼마 전인데 그걸 인식하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해 앞만 보는 청춘, 그리고 당시 사회를 바꿔보려 했던 부모 세대 이야기가 부딪히면 어떤 몽타주가 나올 것 같았다."
▲ 영화 <제비> 스틸 이미지 ⓒ (주)시네마달
<제비>의 또다른 특징은 여성들의 활약을 가감 없이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숙 또한 유일하게 기성세대가 되어서도 집필 활동으로 투쟁을 이어가는 인물이었다. 이송희일 감독은 최근 SNS에 '뚜꺼비 누나'로 불린 인물 관련 글을 올렸는데 전경 앞에서 보도블록을 깨며 당당하게 맞섰던 이였고, 해당 인물이 <제비>에 많은 영향을 줬다는 취지였다. 이송희일 감독은 "제 딴에는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남자 선배보단 여자 선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설명했다.
"다른 영화도 그렇고 여성 운동가, 혁명가에 대한 배분이 현저히 적다는 생각도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제가 배운 선배들을 영화에 끌어오게 됐다. '뚜꺼비 누나'는 두 살 많은 타과생이었는데 당시 추격전을 하며 보도블록을 깨는 건 여선배들이었거든. 민주화 운동 시초기도 한 민청련이란 단체의 로고가 두꺼비였다. 뱀을 잡아먹는 게 두꺼비거든. 영화에 그런 배경을 다 못 담은 게 아쉽긴 하지만 추억에 갇혀 있는 인물이 아닌 지금도 역사를 쓰고 있는 분들을 담고 싶었다."
"세대론은 그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고민해야"
이 대목에서 감독은 적은 예산임에도 함께 영화를 고민하고 헌신한 배우, 스태프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특히 현재의 은숙을 연기한 배우 박미현은 감독에게 생동감 있는 은숙의 모습을 제안했다고 한다. 또한 그간 유쾌한 이미지로 잘 알려진 배우 윤박이 제비 역을 소화한 것, 그 외 주요 캐릭터에 대거 신인 배우를 등용한 것도 감독이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였다.
"박미현 배우와는 20년 지기 친구다. 제가 실수했던 게 은숙을 좀 고루한 사람으로 설정했는데 그분이 그러더라. 과거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계속 꿈을 꾸는 이야기를 썼을 것 같다고. 그래서 막판에 시나리오를 수정했지. 노동 쟁의 현장 등 각종 현실 문제를 쓰는 르포 작업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윤박씨는 예전 제 영화에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그땐 정말 신인이었는데 이미 캐스팅이 끝난 뒤에 와서 오디션이라도 볼 수 있냐고 하기에 형식적으로 봤는데 이젠 스타가 됐다. 그때 이미 연기를 대하는 자세가 매우 진지했다. 까불거리는 이미지를 전복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아서 연락을 했는데 흔쾌히 하겠다고 해서 고마웠지. 현장에서 비슷한 또래 배우 중에선 가장 선배였는데 분위기를 잘 이끌어줬다. 회차가 너무 적어서 신인 배우들에게 연기 디렉션을 할 시간이 없었는데 그 덕에 수월했던 게 있다. 정말 고마웠다."
▲ '제비' 이송희일 감독 영화 <제비>의 이송희일 감독이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시네마달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비>는 사랑을 꿈꾸는 1983년의 혁명가와 프락치,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현재를 살아가는 그녀의 그 시절 로맨스 작품이다. 12일 개봉. ⓒ 이정민
이런 이유에서인지 이송희일 감독은 과거 공개적으로 386을 비롯, 과거 학생운동 때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세대를 비판한 것에서 벗어나 현실 문제와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다듬고 있어 보였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 파벌을 형성하고 결국 기득권화한 기성 운동권들을 비판하기보단 직면한 노동, 성소수자, 장애인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취지로 읽힌다.
"세대론은 바보들의 사회학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노동자들, 성소수자들, 장애인과 연대해 할 일도 많은데 민주화 운동 세대를 비판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더라. 그래서 요즘 기후위기 강연을 많이 다닌다. 누군가는 영화감독이 왜 환경 이야기를 하냐고 물으시는데, 과학자가 아닌 이야기꾼으로서 '여러분, 정말 큰일이에요!'하니 더 공감해주시는 게 있더라.
그간 제가 비판했던 대상이 정치적으로 민주당이라 불편하실 수도 있지만, 그분들이 타협도 많이 했고 한계를 보인 게 사실이다. 국민의 힘이야 말해서 뭐하나. 애정이 있으니 비판도 하는 거라 생각했다. 사실 어려운 이야기다. 어쨌든 저도 독립영화하면서 다른 일도 하고 같이 투쟁도 했는데 옆에서 변해가는 과정을 봤다. 현실정치를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 민주화 운동 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의 적자인 양 생각하는 건 문제다.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여러 이견이 있었는데 전 오히려 민주당 지지하시는 분들이 이 영화를 보시고 함께 고민해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