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비> 스틸 이미지
(주)시네마달
2시간 20분 가까운 시간 동안 호연은 자신에게 너무나 생소했던 30여 년 전 자신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저씨 아줌마들이 헤쳐 나가야만 했던 1980년대의 흔적 곳곳을 관통해 나간다. 일련의 전환점들을 거치면서 호연의 행보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진실로 빨려 들어간다. 특기할 만한 것은 호연이 자신의 친부가 누구인지를 놓고 마치 <스타워즈> 영화 7-9편처럼 갈등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단순히 주말 막장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쟁점이다. 호연은 낭만과 죽음이 함께 하던 가장 순수한 1980년대 '혁명의 시대' 정수를 구현한 것 같은 '제비' vs 변절과 타협을 통해 남한 자본주의체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현수' 둘 사이에서 출생의 비밀 때문에 거듭 혼란해한다.
몇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 호연의 신체적 상황은 점점 한쪽 다리를 저는 현실의 아빠 현수를 닮아가게 된다. 의도적으로 젊은 시절의 현수와 현재의 호연이 상처 입고 절뚝거리며 피 흘리는 이미지가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순수했던 과거 학생운동권들이 군사독재 폭력에 굴복하거나 이후 시류에 영합하면서 권력자나 자본가가 되는 과정이 절반, 그런 아빠-선배세대들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절반 격으로 서로 엉켜드는 형세다. 또 다른 기득권이 되어버린 민주화세대의 위선을 경계하면서도 어둠의 시대에 안정된 미래를 거부하며 분연히 맞서고자 했던 향수를 확인하고픈 복잡한 심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1983년 당시에도 그저 장렬히 싸우는 용감한 소수 vs 침묵하는 다수의 구도로 단순화되는 건 아니었다는 점 또한 영화에서 빼먹지 않는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순수하고 헌신적인 이들 -괴물과 맞서다 괴물을 닮아갈 운명의, 즉자적 대항폭력에 중독되어가는 이들- 공권력의 폭압과 회유에 희생되거나 변절을 선택한 이들이 각자의 군상으로 대두된다. 그렇게 파란만장 가득한 상황에서 전설적인 학생운동 리더 '제비'를 향한 공안당국의 수사망은 죄여오는 중이다. 그리고 어느 날 제비는 사라져버린다. 분노와 비극성은 여기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의 슬픔'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제비의 동지였던 은숙은 위태롭고 궁한 처지였지만 잊을 수 없던 그 시절에 발목이 잡힌 것 마냥 후일담 집필에만 집중한다. 현수는 뭔가 감추고 싶은 게 있는 듯 보인다. 제비는 더 이상 늙지 않았기에 순수함의 표상으로 기억되지만 남은 이들은 노회해져 이합집산하거나 하나둘 어디론가 흩어져간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주화 세대(라고 하지만 각자의 네트워크로 구분되는) 대분열이 화면 속 축소된 소우주에서도 동일하게 펼쳐진다.
호연이 자신의 정신적 부친으로 과연 누구를 택할 것인가와 함께 그가 오랫동안 불화상태였던 아내 은미와 장래에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지는 현실 사회에서 미래 세대가 분열된 채 각자도생에 골몰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세대의 과오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동맹을 형성할 것인가의 화두로 연결된다. <제비>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각자 개인이 아니라 특정 집단 혹은 군을 표상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그래서 인물 설정과 구도가 도식적으로 보일 정도다. 이들이 작품 후반으로 향하면서 씨줄 날줄로 연결되는 구도는 곧바로 영화를 만든 감독의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그런 공학적 설계를 눈여겨볼수록 더 흥미롭게 영화를 즐길 수 있다.(다만 과도하게 인물들의 개별성 대신 캐릭터화에 집중하는 설정에 호오가 갈릴 터이다)
영화는 실제로 부모의 과거를 공유하지 못한 후속세대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와 함께 어느덧 기득권화되고만 과거의 민주화세대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청산해야할지에 대한 제작진의 소신을 선명하게 피력한다. 내적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이다가도, 그 세대가 처했던 폭압과 야만에 맞선 용기와 희생의 순수한 초심은 부디 지금 세대에 전해졌으면 하는 감독의 욕심이 무척 진하다. 그 판단과 수용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 될 테다.
<작품정보> |
제비 Swallow
2022|한국|드라마
2023. 4. 12. 개봉|138분|15세 관람가
감독 이송희일
출연 윤박(제비 역), 우지현(호연 역), 박미현(은숙 역), 장희령(어린 은숙 역),
이대연(현수 역), 유인수(어린 현수 역), 박명신(진경 역), 전수진(어린 진경 역),
박수영(김과장 역), 박소진(장은미 역), 임재혁(어린 정배 역), 정승길(태목 역),
김현목(어린 태목 역), 김왕근(정호 역), 오경주(어린 정호 역), 구성환(상현 역),
장리우(여직원 역), 원태희(눈섭수사관 역)
특별출연 김응수(정배 역)
제작 및 배급 (주)시네마달
2022 30회 레인댄스 영화제 국제장편 경쟁부문(국제장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