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청춘월담>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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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국가에 맞선 사람들
왕조국가들은 반역향이 발생하면 반란 주역들을 처벌하는 것 못지않게 그 지명을 지우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반란지에서 일어난 상황이 여타 지역뿐 아니라 역사 기록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반군을 지우는 것에 더해, 지역 이름을 지우는 데도 신경을 썼다. 벽천 사람들은 고향을 되찾는 것뿐 아니라 벽천이란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원래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에도 집념을 불태운다.
1170년 무신정변으로 사회질서가 동요하자, 6년 뒤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와 망소이가 봉기를 일으켰다. 정중부가 무신정권을 이끌고 명종 임금이 허수아비로 있을 때였다. 이때 천민 거주지인 향·소·부곡의 하나인 명학소에 사는 망이·망소이가 관군을 위협할 정도의 군사력을 과시하며 역사무대에 등장했다(망이·망소이의 난, 명학소의 난).
<고려사> 명종세가(명종 편)는 음력으로 명종 6년 1월 23일(양력 1176년 3월 5일)의 일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공주 명학소 백성인 망이·망소이 등이 같은 편을 불러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고 공주를 함락했다"고 설명한다. 수공업 노동자들이 많은 이곳에서 주민들이 관군을 제압하는 이변을 연출했던 것이다.
정부군 3천 명을 파견했는데도 명학소의 시민군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자 무신정권이 내놓은 조치 중 하나가 지명 변경이었다. 명종세가는 음력 6월 13일(양력 7월 20일)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망이의 고을인 명학소를 충순(忠順)현으로 승격"시켰다고 말한다.
시민군을 달랠 목적으로 소(所)를 현(縣)으로 격상시킨 것이긴 하지만, 착하고 고분고분하게 살라는 의미로 충순이란 지명을 내려준 것이었다. 반역향인 명학소의 이름을 지우려는 의도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조치는 시민군을 충순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 뒤에야 민중봉기는 종결됐다.
충남 공주에서는 조선 인조 때인 1646년에도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이곳 사람 유탁(柳濯)이 관련된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은 공주목을 공주현으로 강등시키면서 그 관할인 니산현·연산현·은진현을 폐지하고 은산현을 새로 설치했다. 니산·연산·은진 세 현의 지명은 다음 임금인 효종이 1655년에 복귀시켰다.
왕조시대에는 반역향이 불명예의 대명사처럼 인식됐다. 반역향 출신들은 <청춘월담> 속의 벽천 사람들처럼 객지에서 집도 구하기 어렵고 일자리를 얻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역향은 생존을 향한 민중의 에너지가 그만큼 강한 곳이었다. 국민이 점점 주인이 되고 있는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민주적 에너지가 특별히 강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역향의 발생은 해당 고을의 지명뿐 아니라 광역 행정구역의 명칭을 변경시킬 때도 있었다. 이복형인 조선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에 즉위한 영조의 52년 장기집권 초기에는 반란 사건들이 많았다. 이런 사건들이 전라도·강원도·충청도 같은 지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영조 11년 5월 1일자(1735년 6월 21일자) <영조실록>에 따르면, 이날 영조는 충청도를 공홍도로, 전라도를 전광도로, 강원도를 강춘도로 개칭했다. 강원도의 경우에는 원주에서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강릉과 원주' 대신 '강릉과 춘천'의 앞 글자를 따서 강춘도로 바꿨다.
전라도에서는 나주가 반란의 도시가 됐다. 그래서 광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충청도에서는 양대 도시인 충주와 청주가 다 관련됐다. 그래서 둘 다 빼고 공주·홍주의 이름을 땄다. 위 실록은 "충주·청주·나주·원주 네 고을이 모두 반역 때문에 칭호가 강등돼 도(道)의 이름도 함께 바꾸게 됐다"고 설명한다.
반역향의 이름을 지우는 관행은 왕조시대가 끝나가던 20세기 초반까지도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그래서 반역향이 반란 당시의 지명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다. 훗날 정세가 바뀌어 원래 지명을 회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란 당시의 집권세력이나 그들의 후계 세력이 존재하는 한은 이름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오명에서 벗어난 도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