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멋진 아침> 포스터 이미지

영화 <어느 멋진 아침> 포스터 이미지 ⓒ 찬란

 
레아 세이두라는 배우를 좋아한다. 일단 그가 출연하는 영화라면 없던 관심이 일정부분 발생하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이는 배우에 대한 팬심이라기보다는 그 배우의 선구안을 믿는 것에 가깝다(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껏 레아 세이두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크게 시간을 버렸다거나 후회한 적이 없기도 하다. (007 시리즈마저도 그랬다) 화려한 배경을 가지고 셀러브리티의 삶을 살기에 그보다 더 어울릴 수 없는 조건을 가졌지만 늘 이 배우는 다양한 삶과 표정에 도전해가며 단독자로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배우가 연기한다는 게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자신이 접하지 못한 것,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영화 속에서 그려내고 있다.
 
미아 한센 러브라는 감독이 있다. <다가오는 것들>부터 시작해 <에덴: 로스트 인 뮤직>, 얼마 전 <베르히만 아일랜드>까지 기대치를 채워주는 감독이다. 그런 감독과 레아 세이두가 만났다고 한다. 선택지가 확 들어왔다. 감독은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짙게 반영한 이번 신작에 자신의 분신 역할로 레아 세이두를 택했다. 그만큼 배우에 대한 기대치와 신뢰감을 부여한 셈이다. 이제 남은 건 둘의 조합이 어떻게 화학적으로 어우러지는가이다.

<어느 멋진 아침>은 레아 세이두의 '얼굴'과 '표정'을 보여주고픈 영화다. 감독은 배우의 얼굴을 캔버스 삼아 자신이 넣고 싶은 표정과 색깔을 선 굵게, 하지만 단조롭지 않게 각인시키려는 욕망을 품는다. 그리고 미아 한센 러브는 레아 세이두를 통해 그 욕망을 분출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얼마나 성공했을까? 관객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감독의 욕망은 다종다양하게 평가될 테지만, 적어도 감독이 레아 세이두라는 캔버스를 통해 인상에 남는 얼굴을 직조한 건 분명해 보인다. 일단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30대 싱글맘 산드라를 구성하는 '세 개의 조각들'
 
 영화 <어느 멋진 아침> 스틸 이미지

영화 <어느 멋진 아침> 스틸 이미지 ⓒ 찬란

 
산드라(레아 세이두)는 8살 난 딸과 함께 사는 싱글맘이다(딸의 아빠와는 사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통역사 일로 생계를 이어가며 딸과 잠시라도 떨어지면 못 살 정도로 찰떡궁합은 아닐지언정 적당히 데면데면한 자매 수준의 관계는 무난하게 이어가며 딱히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당당한 싱글맘이다. 딸과의 관계에서 산드라는 무한의 사랑으로 충만하지도, 그렇다고 냉정하게 선을 긋고 할 것만 하는 사이도 아닌 중간쯤에서 적당히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그런 밀고 당기기를 되풀이하며 관계 유지에 애쓰는 젊은 엄마의 표정이 그의 '첫 번째' 얼굴인 셈이다.
 
그런 산드라에겐 철학교수로 명성이 꽤 있던 아버지 게오르그가 있다. 명망 있는 학자로 제자들의 존경을 받으며 지성과 교양이 뚝뚝 묻어나던 게오르그는 하지만 현재 '벤슨 증후군'이라 불리는 신경 퇴행증상으로 고통 받는 중이다. 뇌에 잘못된 신호가 주어지기에 그는 눈앞의 현실을 온전히 볼 수 없어 시각장애인과 다르지 않은 데다 서서히 기억상실이 진행되는 중이다. 지성으로 가득한 삶을 살던 게오르그에게 현재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다. 딸인 산드라 역시 아버지를 돌보는 데 적지 않은 시간과 수고를 할애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독립한 자녀가 난치병 상태의 부모 수발을 든다는 건 그저 효심으로만 재단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 게오르그 문제에 대처하며 지적이고 현명하던 그의 영락에 당혹해하는 건 물론 심적 부담감에 회피하고픈 산드라의 지극히 인간적인 표정 찰나들이 그의 '두 번째' 얼굴을 이룬다. 누가 산드라에게 돌을 던지랴.
 
산드라는 생계를 위해 매 순간 집중력이 요구되는 통번역 일을 수행하는 한편, 딸을 양육하고 아버지의 요양원 수용절차 때문에 가족친지와 회동하고 시설을 알아보는 등 분주한 일상을 보낸다. 하루하루가 금방 지나가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나날이다. 그런 가운데 옛 친구인 클레망과 우연히 만난다. 우주과학자인 그는 남극기지에서 얼마 전 돌아왔다. 예전엔 좀 친밀했던 '남사친'이던 클레망에게 산드라는 호감이 짙어져간다. 그리고 어느새 애인이 된다.
 
사랑하는 법도 잊어먹었다던 산드라는 클레망과의 관계를 통해 오랜만에 '여자'로서 사랑하는 법을 되찾는다. 하지만 클레망에겐 가정이 있다. 오랫동안 망실했던 한 성인으로서의 사랑법을 오랜만에 회복한 산드라로서는 성에 차지 않는 상황이다. 어렵게 할애한 제한된 시간 내에서 둘은 사랑을 나누지만 단지 '정부'나 '파트너'로서 클레망과 관계를 이어가긴 싫다. 클레망도 그런 산드라에게 끌리지만 10년간 이어온 결혼관계 정리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한 인간으로서 애정 받고 싶은 순수한 표정이 '세 번째'이자 가장 순전한 얼굴로 자리잡는다.
 
너무나 인간적인 주인공의 고단한 일상 묘사가 일품
 
 영화 <어느 멋진 아침> 스틸 이미지

영화 <어느 멋진 아침> 스틸 이미지 ⓒ 찬란

 
이 세 얼굴은 모두 2020년대 파리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30대 싱글맘 산드라의 조각모음을 구성하는 단면인 셈이다. 이 영화 속에는 흔히 주인공에게 천재지변처럼 떨어지는 거대한 사건이나 돌발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상황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며 개개인에겐 심각한 문제일지언정 일상적으로 타인의 일로 치부하면 흔하디흔한 상황으로 분류되기 딱 맞는 정도일 테다.
 
물론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 현대 프랑스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프랑스 영화 특유의 시사문법 속에서 제법 감초 격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이야기 전개에 결정적으로 잇닿아 있진 않다. 무엇보다 1981년생 여성감독이 1985년생 주연배우에게 주문하는 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외모와 배경을 가진 이에게 지극한 생활연기인데 레아 세이두는 각고의 노력으로 이를 구현해낸다. 숏컷을 감행하고 수수한 차림새로 그가 분한 주인공 산드라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변신해 우리 앞에 세 개의 얼굴을 차례로 선보인다. 그게 전부라면 전부인 영화이지만 그 자체가 인물에 몰입하고 공감하게 되면 충만하기 그지없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매 순간 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려는 산드라의 노력과 하지만 힘에 부치는 찰나들, 그 나약한 허점을 드러낼 때마다 도망치고 싶고 외면하고픈 구석들이 관객의 시선에 차례로 잡힌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들이다. 산드라는 클레망과의 사랑을 통해 오로지 순전하게 자신을 찾는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온전한 단독자로서의 순간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지극히 짧고 제약들로 가득하다. 주변 이목도 살펴야 하고 어린 딸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걱정이다. 물론 산드라는 불장난에 자신을 내맡기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래서 더 챙겨야 할 몫이 늘어나고 이를 기꺼이 감내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사랑도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산드라는 그런 질식할 것 같은,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평범한 일상의 질곡을 용케 헤쳐나가며 시간을 보낸다. 딸은 그 나이 또래에 맞게 궁금한 것도 많고 매사에 질문이 넘쳐나는 데다 변덕도 심하다. 걷기 싫다더니 껑충껑충 당나귀처럼 파리의 까마득한 언덕을 뛰어오르는 식이다. 키가 한참 크는 중이라 성장에 수반된 근육통도 앓는다. 아직 한창 때이지만 산드라는 그런 딸의 지극히 당연한 변화에도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다. 클레망과의 관계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란 걸 충분히 예측했다지만 역시 온전히 채워질 수 없는 욕망 때문에 힘겹다. 자석처럼 둘은 들러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차라리 온전히 파트너 관계로만 치부한다면 덜 아프련만 그렇지 않기에 산드라의 갈증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 프랑스, 평범한 시민의 삶과 아침의 풍경화
 
 영화 <어느 멋진 아침> 스틸 이미지

영화 <어느 멋진 아침> 스틸 이미지 ⓒ 찬란

 
하지만 여기에서 일종의 죄의식이자 피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천형으로 그를 옥죄는 건 아버지 게오르그의 몰락이다. 지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지성인이자 평생 사유를 거듭해온 아빠에게 닥친, 본인이 가장 원치 않았을 황혼을 목격해야 하는 자식의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영화 내내 시간을 할애해 게오르그를 찾지만 오래 머물기 힘겨워하는 산드라의 면모, 점점 퇴화해가는 게오르그의 현주소를 보면 적잖은 이들이 거울을 보듯 뇌리에 새길 정도로 본 작품의 묘사는 빼어난 구석이 많다. 그래서 더 눈에 밟히고 마음 한 구석이 아려진다.
 
아빠의 영향을 받아 지적 분위기가 충만한 산드라와 가족친지들의 대화 장면은 게오르그를 요양병원으로 옮기면서 처분해야 하는 그의 책장과 장서들로 이어진다. (영화의 제목 역시 아빠의 지적 유산에서 파생된 것이다) 복지국가 프랑스라지만 여전히 노인을 온전한 돌봄 서비스가 가능한 시설에 맡기기엔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는 상황, 요양시설 종사자의 상당수가 이민자나 그 후속세대로 보이는 직종현실, 부모자식 사이라지만 대소변 처리 시중은 망설여지는 사회적 단절의 풍경이 행간 곳곳에 펼쳐진다. 그런 반면에 아슬아슬하면서도 유쾌한 사회적 연대의 기운들, 산드라의 업무 중 묘사되는 국제행사를 통해 유럽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탐구생활도 촘촘하게 채워진 볼거리로 작용한다.
 
마크롱 정부 치하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항의와 시위의 기운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부위에 가까운 현대 프랑스의 노인복지체계가 당면한 현주소와 고령화 시대의 그림자들이 <어느 멋진 아침> 속에서는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묘사된다. 아직 앞길 창창한 산드라이지만 연인 클레망 앞에서 먼 훗날 자신이 아빠처럼 비참해져 고통 받게 된다면 (장 뤽 고다르가 그랬던 것처럼) 스위스로 가는 걸 도와달라고 청한다. 한 인간의 지적 훈련으로도, 한 사회의 고도로 발달한 시스템으로도 아직 극복하기 힘든 실존적인 고뇌 앞에 선 현대인의 순전한 불안과 질문인 셈이다. 그런 소소한 일상의 표류 속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아직 산드라에겐 남은 시간이 많다. 그런 그에게 문득 다가온 (영화의 제목처럼) '어느 멋진 아침',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작품정보>
어느 멋진 아침
One Fine Morning, Un Beau Matin
2022|프랑스, 독일|로맨스/멜로/드라마
2023.09.06. 개봉|113분|15세 관람가
감독 미아 한센-러브
출연 레아 세이두(산드라 역), 멜빌 푸포(클레망 역), 파스칼 그레고리(게오르그 역).
니콜 가르시아(프랑수아즈 역), 카미유 르방 마르탱(린 역)
수입/배급 찬란
제공/공동배급 ㈜빅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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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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