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목소리> 스틸
시네마 달
일제강점기 먹고 살기 위해 일본에서 일하던 부모 슬하에 태어난 박수남은 본인 언급대로라면 '황국 소녀'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자신이 천황 폐하의 신민임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한편 일본어는 한마디도 모르지만,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해 치마저고리를 입으면 그렇게 빛나던 모친과 함께 거리를 다니길 좋아한 딸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조선인 혐오를 담아 그들을 향해 일본인이 던진 돌은 이 '황국 소녀'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대체 왜 같은 일본인인 우리를 차별하는 걸까.
의문은 해방 이후 분단과 함께 기회를 놓친 후 언젠가 올 귀환을 대비해 동포들이 세운 민족학교에 다니며 해소된다. 식민지 출신들이 정체성을 유지하며 정착하는 걸 우려한 당국이 학교 폐쇄를 위해 공권력을 투입할 때 친구들과 함께 맞서며 자연히 민족 정체성에 눈뜨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민족정신 함양을 주도하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아래 조총련, 친북 성향의 재일본인 단체)계열 기자로 활동하게 된 건 딱히 친북이라기보단 자연스러운 행보였을 테다. 마침 북송선이 출발하고, 박수남의 이모도 배에 오른다. 그렇게 평범한 재일동포의 삶을 살 것처럼 보였다. 어떤 사건을 접하기 전까지는.
훗날 일본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거장 오시마 나기사에 의해 <교수형(교사형)>으로 극화된 '고마쓰가와 사건'이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고등학생 재일동포 소년이 두 명의 일본 여성을 살해한 일은 소년의 신상이 공개되면서 파장이 극대화된다. 장애인 모친을 둔 극빈층 출신으로 공부를 잘했지만, 조선인 차별로 취업이 막힌 불우한 행적 때문이다. 저명한 지식인들의 감형 청원이 이어졌고, 박수남 역시 언론인으로 피의자 이진우를 취재하면서 교류하게 된다. 재일동포라는 공감대 덕분에 둘은 누나 동생처럼 교감하고, 적극적으로 구명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조총련은 재일동포의 흉악범죄가 일본 정부의 표적이 된다는 판단 아래, 박수남에게 지원 활동을 중단하도록 종용한다. 부끄러운 조선인과 엮이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나 그는 이진우의 삶은 조선인으로 정체성을 가질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차별에 직면했기 때문이므로 조선인 사회가 힘써 구명과 갱생에 나서야 한다는 소신을 거두지 않았다. 그 결과 직장을 잃는다. 당시 많은 재일동포들이 호구지책으로 삼던 고깃집을 운영하며 프리랜서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4년 후 끝내 형장에서 사라진 이진우와 교류한 서간집을 펴낸 박수남은 꾸준히 재일동포 사회의 피압박 역사를 기록했지만, 피해자의 망설임과 함께 낮은 학력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말과 글로 오롯이 표현하지 못하는 상대를 보며 깨달음을 얻는다. 글이 아니라 영상으로 기록하는 게 더 적절하고 효과적임을 말이다. 뒤늦게 영상 기술을 습득해 감독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이후 4편의 기록영화를 완성하고 상영과 강연, 행사에 참여하며 사회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2단계: 영화가 아니라면 사라지고 말았을 피해자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