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정년이> 현장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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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시대극 <정년이>의 윤정년(김태리)은 첫 작품 <춘향전>의 방자 역을 무난히 소화한 뒤, 다음 작품인 <자명고>에서 단역인 군졸을 연기하다가 극을 망쳤다. 탁월한 노래 솜씨와 즉흥적인 연기로 관객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다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가 주인공인 극의 흐름을 훼손했다.
진노한 매란국극단장 강소복(라미란 분)은 "넌 내일부터 무대에 설 수 없다"며 중형을 선고하고, 이로 인해 윤정년은 극단의 허드렛일을 떠맡게 된다. 하지만 이후 공연에서 주요 배역에 펑크가 났고, 강소복 단장은 다른 배역 대사까지 모두 외워둔 윤정년을 다시 올린다. 윤정년은 이전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배역을 훌륭히 소화해낸다.
195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여성국극단들은 <춘향전>이나 <자명고> 같은 한국 고전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생소한 외국 고전도 소화해냈다. 2008년에 <낭만음악> 제20권 제3호에 실린 주성혜의 논문 '전통예술로서의 여성국극'은 이 분야의 주요 소재 중 하나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번안극 <청실홍실>, <오텔로>의 번안극 <흑진주>,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줄거리를 윤색한 <햇님달님>처럼 외국 문학을 재료로 삼은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여성국극은 외국 고전들을 우리 음악으로 녹여냈다. 위 논문은 "창작된 대본에 붙여진 음악은 현재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혼성 창극의 성격과 역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기존의 판소리, 민요 창법을 바탕으로 대금·아쟁·거문고·장고·가야금을 기본 구성으로 한 수성가락 반주로 구성됐다"고 기술한다.
지금의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서양 중세를 배경으로 머릿속에 형상화시키지만, 1950년대의 국극 관객들은 이 작품을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형상화시킬 수 있었다. 원작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단점은 있지만, 외국 고전을 좀더 친숙히 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해판 로미오와 줄리엣
2013년에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제26권에 실린 송소라의 '번안 여성국극의 원작 수용 양상과 문학적 함의'에 따르면, 1952년 11월 5일 부산극장에서 여성국극동지사가 초연한 <청실홍실>은 원수지간인 좌상과 우상의 자녀들을 등장시킨다. 고려성이 짓고 이유진이 각색한 이 작품은 우상의 딸인 홍랑과 좌상의 아들인 청사랑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려낸다.
좌상 가문과 우상 가문에서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들이 배출됐다는 설정은 캐풀렛 가문의 딸인 줄리엣과 몬터규 가문의 아들인 로미오를 등장시키는 원작보다 이해하기가 쉽다. 적어도 1950년대 한국 대중에게는 좌상과 우상을 대비시키는 이 방법이 더 친숙했을 것이다.
<청실홍실>의 역사적 배경은 남북국시대의 발해다. 그리고 종교적 배경은 불교다.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결혼 주례자로 로런스 신부가 등장하지만 <청실홍실>에는 발해 수도 상경의 스님들이 나온다. 이 번안작은 발해판 줄리엣과 로미오가 석가모니 탄신일에 첫 만남을 갖는다는 설정을 보여준다.
위 송소라 논문은 "제1막은 4월 초파일 관등노리 밤, 용천사 대웅전 앞에서 펼쳐진다"고 설명한다. 곳곳에 등불이 켜진 낭만적인 공간에서 좌·우상 자녀들이 부딪혔던 것이다. "가면을 쓰고 관등노리에 나온 좌상의 아들 청사랑과 우상의 딸 홍랑은 서로 만나 한눈에 반하지만, 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집안의 사랑임을 알고 절망하는 것으로 하막한다"고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