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おきなわじま,Okinawa)는 일본 서남부의 난세이 제도에 위치한 지역이다. 과거 이 지역은 '류큐 왕국'이라 불리며 일본과는 독자적인 역사와 언어, 전통을 지닌 독립국이었다. 현재의 오키나와가 완전한 일본의 영토로 정식 편입된 것은 1972년으로 불과 52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때 해상무역으로 번성하던 오키나와는 중국·일본·미국의 지배를 연이어 거치면서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배신과 수탈이 반복되는 기구한 역사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오키나와인의 한을 대표하는 말이 바로 '일본 속의 이방인'이라는 표현이다.

아름다운 옥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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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장면 갈무리tvN

지난 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는 '중국, 일본, 미국에 배신당한 땅 오키나와'편에서 오키나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조명했다. 박삼헌 건국대 일어교육과 교수가 강연자로 나섰다.

오키나와 제도는 일본 본섬을 중심으로 약 1000킬로미터에 걸쳐 2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고대부터 이 섬들은 오랫동안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채 호족들이 독립적으로 지배해온 지역이었다.

1429년 오키나와에 최초의 통일왕국인 '중산국'이 탄생하며, 당시 동아시아의 강대국이던 명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 명나라 선덕제는 중산국의 국왕 쇼 하시를 군주로 책봉하면서, '아름다운 옥구슬'이라는 의미를 지닌 '류큐(琉球)'라는 국호를 내렸다.

류큐는 명나라의 책봉 조공국이라는 지위를 등에 업고 해상왕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류큐는 명나라와 조선, 일본, 동남아시아를 오가며 중계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며 15-16세기에 독자적인 국가로 성장,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국시대와 도요토미-에도 막부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군사적인 팽창은 류큐의 평화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의 강력한 군벌이자 일본에서 류큐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인접했던 사츠마번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류큐에게 군량미 제공과 전쟁가담 등 무리한 요구를 거듭하며 압박했다.

임진왜란 종전 이후,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출범하면서 일본의 류큐 위협은 더욱 거세진다. 1609년 사츠마번은 마침내 군사를 동원해 류큐를 무력 침공했고, 오랫동안 평화에만 익숙했던 류큐는 힘 한번 못 쓰고 허무하게 굴복한다.

사실 류큐는 명나라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왔던 것처럼 자신들도 보호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당시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던 명나라는 후금(훗날의 청나라)을 상대하느라 류큐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이로써 류큐는 하루아침에 일본의 조공국으로 전락했다.

일본은 교활하게도 류큐에게 명나라와의 조공무역 관계는 그대로 유지하게 하면서 공물과 중개무역으로 얻은 이익까지 착취했다. 명나라의 사절단이 류큐에 방문하기라도 하면 일본은 관리와 선박을 철저히 숨겼고 일본식 풍습도 금지하며 이미 류큐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은폐했다. 류큐는 명나라와 일본에 이중으로 조공을 바치면서 오랫동안 끊임없이 수탈을 당해야 했다.

일본의 계략

 방송 장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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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들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근대화에 성공했다. 영토 확장을 꾀한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1872년 '류큐 처분'을 내리며 류큐를 일본의 지방 행정구역으로 강제 편입했다.

이어 1879년에는 결국 류큐를 무력 점령하고 국왕을 폐위시킨 뒤 일본은 450여 년간 쓰여져오던 류큐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포고안을 발표했다. 현 지명인 오키나와는 일본어로 '바다의 먼 곳에 새끼줄처럼 이어져 있는 섬들'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류큐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강도 높은 일본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훗날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저질렀던 것과 비슷한 '문화 말살 정책'이었다. 일본은 류큐어의 사용을 엄격하게 금지했고 류큐인들은 일본 신민들처럼 강제로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받으며 세뇌 교육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일본 사회에서 류큐인이란, 그토록 일본인으로의 동화를 강요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모순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였다. 1903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내국박람회'에서 류큐인을 일본이 강제 점령한 조선이나 타이완인, 홋카이도 아이누족 등과 함께 '일본인과 가깝지만 다른 인종'으로 분류해 전시한 '인류관 사건'은, 일본의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드러낸 대표적인 일화로 꼽힌다. 이처럼 일본은 류큐인을 동등한 일본 국민이 아닌 '2등 신민'으로 취급하며 차별했다.

1940년대 들어 2차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오키나와는 하루아침에 전쟁터가 되어 온갖 시련을 겪어야 했다. 전세가 기울어진 일본은 오키나와를 본토의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1945년 4월부터 오키나와는 연합군 함대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되었고, 일본군은 게릴라전과 자살 공격까지 펼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오키나와 전역은 태평양 전쟁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잔혹했던 전투로 꼽힌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제국은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의 어린 소년들을 '철혈근황대'라는 이름을 붙여 징집하며 자살특공대로 활용했다. 또한 여학생들은 '히메유리 학도대'라는 이름의 간호병으로 징집되어 부상병들을 돌보게 했다. 일본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학도대 소녀들을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내버려두고 그대로 도주했다. 기록에 따르면 학도대로 차출된 240여 명의 소녀 중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일본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군은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 주민들에게 강제로 집단 자결을 종용하는 광기를 일삼았다. 1945년 6월 23일을 끝으로 오키나와 전투가 공식 종료될 때까지 오키나와 출신 군인 3만 명, 민간인 약 9만 40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오키나와 전체 주민의 1/4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였다. 미군과 일본군 사망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례로, 당시 오키나와 전투가 얼마나 무의미한 희생으로 첨철된 광기의 전쟁인지 보여준다.

미국의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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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에 미 군정이 도입됨에 따라 오키나와 역시 미군의 통치를 받는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은 종전 7년 만에 미군정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했지만, 한편으로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을 통해 오키나와에서만큼은 통치권을 더욱 강화한다. 이는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들과 인접한 요충지인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설립해 군사 거점화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지 건설을 위해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몰수했고 저항하는 주민들을 수용소에 가두기도 했다.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벼랑 끝에 몰렸다. 이후 일본 본토에 있던 미군 기지들까지 하나둘씩 오키나와로 이전하면서 그 규모는 더욱 확대된다.

미군 기지의 확장과 더불어 오키나와 일대에서 미군 관련 범죄와 각종 사건·사고도 급증했다. 1955년에는 가데나 공군 기지에서 오키나와인 소녀가 미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해 시신이 유기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정의 통치를 받던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었고, 범인은 본국 송환 이후 감형되어 솜방망이 처분에 그쳤다.

1960-70년대 들어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의 횡포로 인한 반미 감정이 확산되면서 일본 복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일본은 1960년대 들어 경제 부흥에 성공하여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정작 오키나와인들은 국적상 일본인이면서도 자국민으로의 권리와 보호를 받지 못하는데 불만이 팽배했다. 여기에 오키나와가 미군의 군사거점이 되면서 전쟁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된 것도 원인이었다.

미국도 일본과의 동맹 강화를 위한 이해관계가 일치하며 1972년 5월 15일, 약 27년 만에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 결정이 내려진다. 하지만 또다시 오키나와인들이 뒤통수를 맞는 상황이 벌어진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반환하면서도 주일 미군 기지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일본 정부와 합의했다. 또한 미국은 3조 2천억에 이르는 오키나와 반환 비용과 2조 원(추정)에 이르는 주일 미군 주둔 비용(2021년 기준)도 모두 일본 정부가 부담하는 밀약을 맺었다.

오키나와는 대규모 군사시설로 인해 기업유치가 어려운 지역으로 꼽히며 지역발전이 더뎠다.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연간 소득 최저, 높은 청년 실업률이라는 오명과 함께 빈곤한 지역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반환 이후로도 수십 년간 오키나와는 계속된 미군 범죄와 항공기 사고 등이 수백 건 이상 벌어지고 있다. 각종 문제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 기지 이전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일본 정부는 대미 관계와 동아시아 안보를 이유로 미군 기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어서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 내 지역 차별 역시 여전히 오키나와의 풀리지 않은 숙제다. 2016년에는 오키나와에서 시위활동을 벌인 시민에게 일본 경찰이 오키나와인을 비하하는 '토인(야만인)'이라는 발언을 저질러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현재에도 일본 사회 곳곳에서 오키나와를 향한 지역 차별과 혐오의 표현들이 만연하고 있다.

'신하들이여, 슬퍼하지 말라. 생명이 있어야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는 류큐의 마지막 국왕이던 쇼타이가 망국의 운명을 슬퍼하는 류큐인들을 위로하며 남긴 어록이다. 이는 오키나와의 기구한 역사를 함축한다. 한때 동아시아의 해상무역 강국이자 독립국이었던 오키나와는,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일본-미국 등 어디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한 채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역사적 아픔을 공유한 우리에게도 많은 동질감과 여운을 남기는 대목이다.
벌거벗은세계사 오키나와 류큐왕국 주일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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