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페이퍼맨>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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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흔히 '히어로' 물이라 불리는 슈퍼 영웅 장르, 혹은 전자에 빗댄 소시민의 영웅을 주역으로 삼은 로컬 영웅의 소소한 코미디물로 간주하기 딱 좋다. 폐지를 주워가며 호구지책으로 삼던 중년 남자가 알고 보니 드러나지 않은 과거와 막강한 힘을 숨긴 '초인'이라 주변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도 재기한다는 설정은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이 영화 <페이퍼맨>에서 그런 상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니 49% vs. 51% 비율로 전자와 후자 지분이 갈린다. 이 차이는 < 넘버3 >에서 한석규가 이미연에게 툭 던지던 대사처럼 절대적인 차이다. 남자 '인목'은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다니지만, 그가 결코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게 있다. 바지 뒷주머니에 절대 흘리지 않게 꽉 끼워둔 빛바랜 사진 한 장,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한시도 목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메달 하나다. 인목에게도 찬란했던 과거가 있었음을 이 둘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인목은 아시안 게임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주변 사람들도 조금씩 그의 자랑이 허풍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왜 그가 이렇게 몰락했는지 비밀을 추적하는 순서가 될 테다.
인목은 배달 부업에 나갔다가 우연히 운동하던 시절 후배와 재회한다. 영락 그 자체인 인목에 비해 젊은 시절 그가 스포츠계의 그릇된 관행으로부터 감싸고 보호해 주던 후배는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허우대가 멀쩡하다. 둘은 오랜만의 재회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 후배가 잘사는 비결을 궁금해하는 인목에게 상대는 필사적으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선 남의 것을 빼앗아야 그게 되더라는 덕담을 전한다.
인목은 그 대화가 인상 깊었는지 그저 호구지책을 넘어 폐지 수거 물량을 장악하며 굴다리의 유력자가 되어간다. 후배의 덕담을 따르다 보니 저절로 먹고 살 만해진 셈이다. 그는 어느새 굴다리를 벗어나 재기할 상상에 이른다. 하지만 후배 말대로 늘 자신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의협심과 정의감 가득하던 인목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내가 남의 걸 빼앗는다면, 나보다 더 강한 자가 내 걸 빼앗는 걸 막을 수 없다는, 약육강식의 잔인한 섭리다. 인목의 일장춘몽은 곧 더 거대하고 훨씬 잔인한 세력에게 산산이 붕괴할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침내 잔혹한 현실에 직면한 인목에겐 몇 가지 선택지가 놓인다.
① 자신이 젊은 시절 많은 걸 희생해 가며 편입되지 않으려던 세상의 무정한 질서에 가담해, 즉 변절을 통해 부스러기라도 챙기자.
② 과거의 자신처럼 스스로 희생해 부당한 세상에 작은 파열구라도 내보자.
③ 어떻게든 외부의 질서를 벗어난 율도국을 만들자 등이다.
물론 어느 하나 인목에게 쉬운 방책이 아니다. 가장 안락하고 확률 높은 첫 번째는 도저히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이제 그의 쇠락한 육신으로는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한때 실력으로 모든 차별과 억압을 돌파할 수 있었지만, 석연치 않은 사정으로 그는 이제 허리마저 부실해 육체노동도 힘든 병든 몸이다. 세 번째는 이미 굴다리에 그가 세웠던 박스집이 사라지듯 외부 압력에 너무나 쉽게 무너질 위험에 노출된다. '페이퍼맨'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되, 그가 재량을 행사할 여지는 전무한 셈이다.
이색적 변주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