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티빙
티빙 사극 <우씨왕후>의 고국천태왕(고국천왕)과 재상 을파소를 보니 지금 상황이 더 답답하기만 하다. 재정이 열악해지면 국가가 일반 국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진다. 고국천태왕과 을파소가 실시한 진대법 같은 개혁은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봄·여름·가을에 곡식을 빌려줬다가 겨울에 갚도록 하는 진대법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개혁이다. <우씨왕후> 제1회에서 귀족 대신들이 고국천태왕의 부재를 틈타 을파소를 압박하고 진대법을 무산시키려 하는 장면에서 보듯이, 이 조치는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진대법은 서민층을 위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지만, 귀족층의 이익을 과감히 억누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개혁은 돈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봄부터 곡식을 빌려주고 겨울에 돌려받으려면 국가의 재정 여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노동력의 국경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왕조국가 시대에는 노동력과 토지를 늘려 세수를 증대하는 방편으로 전쟁을 자주 활용했다. 왕조국가들은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이런 전쟁에 대비해 비상금을 두둑이 갖고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대법까지 실시하려면 나라 곳간이 상당히 풍족해야 했던 것은 당연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고국천태왕과 을파소가 그 많은 재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를 시사하는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책 고국천왕 편은 진대법 시행 4년 전인 190년에 좌가려의 난이 있었다고 알려준다. 외척 반란인 이 난이 일어나 고구려가 들썩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대법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 반란은 이듬해에 진압됐다. 이런 사건 뒤에는 의례적으로 몰수 처분이 뒤따랐다. 반란 주역들이 보유했던 노비와 토지의 소유권이 국가로 이관되는 일이 뒤따랐다. 고구려본기는 승자인 고국천태왕이 확보했을 몰수 자산의 규모를 짐작게 하는 자료들을 보여준다.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태왕이 그를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태왕이 그렇게 한 것은 좌가려 일파가 외척의 권세를 믿고 국정을 농단할 뿐 아니라 "남의 자녀와 남의 전택을 약탈해 국인(國人)들이 원망하고 분개"했기 때문이라고 고구려본기는 알려준다.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국인'을 우리 시대의 한자 용례에 따라 '나라 사람들'로 번역한 서적들이 많지만, 국인은 '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도성 사람들'을 의미할 때도 많았다. 고대에는 '국'이 도성의 의미로도 쓰였다. 그런 시절에 국인은 도성에 거주하는 지배층을 의미할 때가 많았다.
남성 후계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국인들의 추대로 왕이 됐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은, 당연한 언급이 되겠지만, 선덕여왕이 나라 백성들의 민주적 추대로 왕이 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라벌에 사는 신라 지배층의 지지로 즉위했다는 의미다.
좌가려 일파의 약탈에 대해 국인들이 분개했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노비와 토지를 탈취했는지를 시사한다. 일반 민중이 분개한 게 아니라 지배층이 분개했다는 것은 약탈 규모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인 연나부 내의 4개 그룹이 반란에 가담했으며 이들의 군대가 도성을 공격했다고 알려준다. 연나부를 주도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도성 공격에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했다는 것은 이들이 보유한 경제력이 상당했음을 알려준다.
좌가려 일파의 경제력은 반란 진압 뒤에 태왕의 소유로 몰수될 수밖에 없었다. 난이 진압된 직후에 태왕이 귀족 가문에 휘둘리지 않는 실력주의 인재 등용을 천명하면서 을파소라는 농민을 재상으로 전격 발탁한 것은 귀족들의 기가 꺾인 당시의 분위기와 연관된다.
'부자 몰수'로 성사된 진대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