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가 8월 19일부터 25일까지 열립니다. 32개국 53편에 달하는 다큐멘터리 작품 중 눈에 띄는 다큐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지난 2012년 개봉해 화제가 된 영화가 있다. 고 이선균, 김민희 주연의 영화 <화차>는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사러 간다며 감쪽같이 사라진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약혼자는 그녀를 찾기 위해 나섰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이름, 신상 등이 모두 '가짜'였다. 변영주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의 원작은 일본의 대표적 작가 미야베 마유키의 소설이다.

2023년 개봉한 쓰마부키 사토시 주연의 <한 남자> 역시 죽은 남편이 알고 보니 자기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역시나 일본 영화로 일본 아카데미 상 8관왕을 휩쓸었다. 자신이란 존재를 지우고 사라지는 사람들, 일본 특유의 사회적 현상인 '조하쓰(蒸発)'이다. 2024 EIDF 페스티벌 초이스 작품인 <증발된 사람들>이 역시 이러한 일본 사회의 현실을 따라간다.

 증발된 사람들

증발된 사람들 ⓒ eidf2024


영화는 긴장감이 감도는 주택가 골목으로부터 시작된다. 작전하듯 주위를 살피는 차 안의 사람들, 이들은 '나이트 무빙 컴퍼니'의 '나이트 무버' 들이다. 이른바 '야반도주 서비스', 사라지고 싶은 이들을 은밀하게 사라지도록 돕고, 새로운 곳에 직장과 거주처를 소개하며 때론 경찰서와 각종 법률적 문제도 함께 해결해 준다.

나이트 무버가 탄 차로 황급히 올라타는 한 남자, 오다씨(실명). 여자 친구가 샤워하러 간 틈에 도망쳤다는 그는 에코백 하나만 챙겼다. 나이트 무버는 "이제 못 돌아가요"라고 무겁게 말한다.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오다씨는 두려운 듯 계속 뒤돌아본다. 그가 남겨 둔 사람은 여자 친구, 평소에도 질투심이 많았다는 그녀는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나자 남자 친구를 '감시'하는 등 증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죽느냐, 사라지느냐

일본에서는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라져 자신을 지운다. 사라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사건이 없는 건 아니지만, 1990년대 버블 경제의 붕괴에 일본 특유의 문화가 맞물려 '실종'이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인은 죄의 중요성보다 수치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본은 수치심의 문화이며 치욕을 원동력으로 한다.

책 <국화와 칼>은 일본인들이 수치스럽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는 사고방식이 일본인들을 지배한다고 언급했다.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을 치른 미국은 홀로 비행기를 몰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일본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일본의 사회, 제도,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에게 저술을 부탁했고, 그 결과가 담긴 분석이다.

죄를 짓는 것과 자신의 죄가 주변인들에게 알려지는 것,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둘 중 무엇이 더 치욕스러울까, 일본인들은 죄 자체보다 주변인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더 힘들어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명예로운 삶을 위해 '자결'이란 죽음의 방식이 받아들여졌고, 반대급부로 명예롭지 못한 채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것이 매우 수치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어디 수치스럽다고 죽는 게 쉬운 일인가, 이에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을 택한다.

 중년 남성은 중견 기업을 이끌다 증발했다.

중년 남성은 중견 기업을 이끌다 증발했다. ⓒ EBS


야쿠자 피해 도망친 사람

다큐는 다양한 이유로 살던 곳을 떠나온 이들을 담는다. 스키모토씨(실명)는 한때 중견 기업을 이끌던 CEO였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 내려온 회사가 그의 대에서 어려워졌다. 빚이 약 5억엔(45억 원)에 이르자, 무섭다는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텅 빈 상태가 됐다.

생명보험이 있었다. 하지만 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이기적으로 행동해서 미안하다. 시간을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가족과 회사 사람들에게 남겼다. 출장을 가는 것처럼 떠나려던 날,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인 막내가 물었다. '언제 와?', 사흘 후에 온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여전히 사채업자들이 쫓아올지도 모르는 위협에 시달리는 그는 비지니스 호텔과 차 안을 전전한다.

나가야마의 가난한 청년. 그는 야쿠자 사무실에서 전화 받는 일을 했다. 그러다 야쿠자에게 돈을 빌렸고 갚지 못하자 무서워 배를 타고 도망쳤다. 그게 37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거리의 빈 캔을 주워 그날그날 살아가는 처지다. 부모님은 파친코를 하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지만, 그는 돈이 좀 남는다 싶으면 파친코로 향한다. 그가 머무는 곳은 니시나리, 그와 같은 날품팔이 인생들의 천국 같은 곳이다. 블랙 기업의 마수에 빠져 그걸 메꾸다 메꾸다 떠나온 이도 있다. 그가 일하는 곳은 러브 호텔, 그곳에서 숙박과 일자리를 해결한다.

 증발한 아들 가즈키를 기다리는 엄마

증발한 아들 가즈키를 기다리는 엄마 ⓒ EBS


왜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 가족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까. 떠나온 이들에게는 가족마저도 피하고 싶은 대상인 경우도 있다.

역시나 러브호텔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보통의 삶이라면 둘째 아이를 낳을 나이인데, 또래들의 삶을 누리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린다. 가족에게 돌아가 평범한 생활을 하기 어려워 하는 그녀는 그 이유로 '가족'을 언급했다. 학창 시절에는 성적이 안 나오면 집에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야단스러우셨던 부모님, 교우 관계도, 수입까지 과보호했다. 그런 '독이 되는' 관계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증발해 사라진 아들을 애타게 찾는 부모도 있다. 가즈키(실명)의 엄마는 아들이 어릴 때 이혼해 아들을 과보호했다고 후회한다. 속죄의 마음으로 아들을 찾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애타한다.

여성에게 정신적인 폭력을 당하다 '증발'한 남성, 그는 가정 폭력을 당하다 '증발'한 여성을 만나 부부가 됐다. 과거 '야반도주 서비스'의 '의뢰인'이었던 그는 이제 '서비스'를 해주는 입장이다. 야반도주 서비스 방식은 다양하다. 누군가 조용히 집을 떠나면 서비스 업체 관계자는 그(녀)가 떠난 집을 정리하며 흔적을 없앤다.

'증발'하려는 사람들의 야반도주를 돕는 서비스가 있는가 하면, '증발'된 이들을 찾아주는 서비스도 있다. 아들을 찾고 싶다는 엄마의 의뢰에 또 다른 서비스 업체가 나선다. 누군가는 사라지는 것을 돕고 누군가는 사라진 사람을 찾는다. 일본의 두 서비스 사이에 사람들은 오늘도 '증발'되고 있다.

 증발된 사람들

증발된 사람들 ⓒ eidf2024



EIDF2024 증발된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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