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제(正德帝), 가정제(嘉靖帝), 만력제(萬曆帝)는 중국 왕조 명(明) 제국의 역대 황제들이자, 소위 '명 3대 암군'으로 더 유명한 인물들이다. 혹은 이들과 천계제(天啓帝), 숭정제(崇禎帝)까지 더하여 5대 암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14~16세기 한때 동아시아의 최강 대국으로 군림하던 명 제국이 무너지게 된 결정적 원인도, 바로 무능한 군주들의 연이은 실정과 기행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최대 비극은 무능하고 비정상적인 군주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번갈아가며 계속 집권한 데다, 그 기간도 어마어마하게 길었다는 점이다. 능력이 아니라 '혈통과 세습'으로 통치자가 결정되는 왕조 국가 체제의 문제점을 어쩌면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방송 갈무리

방송 갈무리 ⓒ tvN

 
지도자의 중요성

지난 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63회에서는 '명나라를 망친 희대의 폭군들' 편을 통해 한 제국의 흥망성쇠로 돌아본 지도자의 중요성을 조명했다. 조영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이 건국한 명나라는 3대 영락제(永樂帝)의 시대에 이르러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자리 잡으며 국력을 과시했다. 또한 9대 홍치제(弘治帝)는 혼란해진 사회를 수습하고 법치와 경제를 부흥시켜 명나라의 국력을 다시 회복시킨 명군으로 꼽힌다. 홍치제의 치세는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며 불리며 명나라의 마지막 전성기로도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명군이었던 홍치제의 과오는 너무 일찍 요절하고 최악의 후계자를 두었다는 점이었다. 1505년, 과로에 시달리던 홍치제가 약을 잘못 먹어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면서, 그 뒤를 이은 것은 장남이던 10대 정덕제 주후조(朱厚照)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나라는 국가 멸망까지 이어지는 '암군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하게 된다.

정덕제는 어린 시절만 해도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해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 그런데 막상 즉위하고 난 후 정덕제는 180도 달라진 본색을 드러낸다.

정덕제는 태자 시절부터 몸종이었던 환관 유근(劉瑾)을 유독 총애했다. 유근은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을 저지르며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둘렀고, 명의 조정에서는 환관과 간신들이 득세하게 된다. 훗날 유근이 뇌물과 역모혐의로 비침하게 처형된 이후에도 환관들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특히 정덕제는 이른바 재미있는 놀이에 미친 '예능 덕후'로 유명했다. 어릴 때부터 환관들에 둘러싸여서 기발하고 흥미로운 놀이를 하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정덕제는 태자 시절에는 말을 타고 교외에 나가 전쟁놀이를 즐겼다. 또 즉위한 후에는 '표방(표범이 사는 집)'이라는 별궁을 만들어 표범, 사자, 기린, 타조 등 당시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신기한 동물들을 조공품으로 들여와 자신만의 동물원을 설립했다.

황제 개인의 취미생활을 위해 표방을 만드느라 200여 채의 가옥과 밀실, 사냥터 등을 조성하는데 들인 국가 예산만 5년간 무려 은 24만 냥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2만 명의 사람들이 1년간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큰돈이었다. 정덕제는 이곳에서 맹수들을 훈련하는 놀이를 즐기는가 하면, 동물들끼리 정력 대결을 시키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맹수 한 마리를 관리하기 위해 병사 240명에 달하는 과도한 인력이 동원되기도 했다.

정덕제가 23세이던 1514년에는 정월대보름을 맞이해 등불놀이를 하다가 자금성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정작 정덕제는 이를 보고도 오히려 "멋진 불꽃놀이구나"라며 오히려 즐거워했다고 한다. 당시 화재로 전소된 건청궁을 복구하는 데 100만 냥에 이르는 예산을 투입해야 했다. 이는 당시 지방관 2만 명의 2년 치 월급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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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색 밝힌 정덕제

정덕제는 여색을 무척 밝혔다. 서역(이슬람) 출신 여성들을 선호하는가 하면, 마음에 드는 여성은 유부녀와 임산부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마음에 드는 소년들을 양아들로 삼는 등 남색도 마다하지 않았다. 간신과 환관들은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해 앞다퉈 여성들을 바치면서, 표방은 어느새 황제의 엽색행각을 충족시켜 주는 놀이터로 전락했다.

정덕제의 또 다른 은밀한 취미는 시대를 앞서간 '부캐(부캐릭터)놀이'였다. 정덕제는 '주수'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관직을 내리고 대장군겸 진국공으로 삼았다. 마치 <배트맨>에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창조한 것처럼, 정덕제에게 주수라는 캐릭터는 전쟁영웅을 선망하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페르소나였다.

정덕제는 황제의 본업까지 내팽개치고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해 놓고는 현지에서 각종 유흥을 즐겼다. 신하들의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정덕제는 자신이 아닌 주수가 출병하는 것이라는 핑계를 내세워 무시했다. 양주에서는 정덕제 덕분에 기녀들 몸값이 두 배로 뛰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정덕제는 진압이 끝난 반란을 자신이 직접 평정했다는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 이미 체포한 주동자를 '풀어줬다 다시 잡는' 어이없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덕제의 끝없는 기행이 끝난 건 어이없는 사고 때문이었다. 대운하에서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놀던 정덕제는 만취해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무사히 구조는 됐지만 이후로 심한 감기를 앓던 정덕제는 북경으로 돌아온 뒤, 1521년 사고 한 달 만에 불과 30세의 젊은 나이로 결국 세상을 떠난다.

그래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정덕제는 "지금까지 짐이 한 짓들은 전부 짐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너희는 짐의 행동을 보고 근신하며 이후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정덕제의 생전 행적과 도저히 맞지 않는 유언의 진위성에도 의문을 제기하며, 황제의 이미지 보호를 위한 신하들의 사후 창작이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덕제는 무려 17년에 이르는 재위기간 동안 여색을 탐했지만, 황위를 이을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결국 제위를 계승한 것은 정덕제의 사촌 동생이자 8대 성화제의 손자인 가정제 주후총(朱厚熜)이었다. 그리고 그는 훗날 정덕제가 차라리 평범해 보일 정도로 한술 더 뜨는 암군이었음이 드러난다.

미신에 집착한 가정제

정덕제가 '예능 마니아'였다면, 가정제는 '미신'에 광적으로 집착한 인물로 요약된다. 도교(道敎)를 유난히 신봉했던 가정제는 스스로를 신선이라 칭하고 엄청나게 긴 도호를 붙이는가 하면, 자금성 안에 도교 제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 몰두했다.

가정제는 소원절과 그 제자 도중문 등 도사들을 총애해 그들에게 국정을 맡기거나 황실 내부의 일까지 관여하게 했다. 가정제가 이룡불상견(二龍不相見, 황제와 태자는 만나서 안 된다)이라는 도사들의 궤변을 맹신해, 아들인 태자(훗날의 융경제)를 냉대하고 이름을 지어주거나 태자 책봉을 미룬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으로 몸이 약했던 가정제는 진시황처럼 불로장생(不老長生)에 유난히 집착했다. 가정제는 도중문의 말만 믿고 어린 궁녀들의 생리혈을 취합해 비상과 수은을 섞어 불로장생의 약을 제조했다. 당시 14세 이하의 어린 궁녀들이 천 명 이상 차출돼 입궁했으며, 강제로 월경을 유발하기 위한 약을 먹었다가 출혈로 사망한 경우가 허다했다.

오죽하면 가정제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궁녀들이 황제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며 대거 처형당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가정제는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자신이 살아난 것은 "하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하며 더욱 미신에 빠져들었다.

급기야 가정제는 정무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20여 년 가까이 궁전에만 틀어박혀 도술에만 심취했다. 수많은 도교사원을 짓고 행사를 치르느라 엄청난 국가 재정이 탕진됐다.

이처럼 가정제가 미신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는 사이, 국력이 약화된 명나라는 1550년 몽골계 부족인 알탄 칸의 침공으로 수도 베이징이 포위당하는 경술의 변(庚戌之變)이라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남쪽에서는 일본의 해적인 왜구들의 빈번한 해안 침공까지 벌어져 많은 백성이 약탈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거나 유랑민으로 전락했다. 명나라 후반기 북쪽 유목 민족과 남쪽 왜구의 침입에 번갈아 시달린 상황을 칭하는 말이 바로 북로남왜(北虜南倭)다.

미신에 빠져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힌 가정제는 불로장생을 위해 과다 복용한 약물 부작용으로 1567년 1월 23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가장 최악의 군주 만력제

가정제의 뒤를 이은 융경제(隆慶帝)는 명나라 말기의 마지막 명군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융경제는 자금성 안의 도사들을 몰아내고 해외 교역을 재개하며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명나라로서는 불운하게도 융경제는 재위 5년 만인 1572년 5월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그 뒤를 이이 융경제의 3남이자 하필 명 3대 암군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평가를 받는 '최종보스' 만력제 주익균(朱翊鈞)이 등장한다.

만력제 역시 어린 시절에는 총명했다고 하며, 재위 초기에는 스승이자 명신이었던 장거정(張居正)이 재상으로 국정을 총괄하며 활발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만력제는 장거정의 정치스승으로 삼아 개혁정책을 지지하며 차근차근 국정을 배워나갔다.

하지만 장거정은 1582년, 만력제가 19세일 때 세상을 떠난다. 또한 사후에 장거정의 부정부패가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만력제는 믿었던 스승의 비리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장거정 없이 혼자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만력제는, 황제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신하들과의 대립을 겪으며 점점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이에 만력제가 내린 충격적인 결단은 놀랍게도 황제의 '파업'이었다. 만력제는 병을 핑계로 신하들과 만나 국정을 논의하던 조회와 강연에 출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시적인 해프닝인 줄로만 여겼던 황제의 결석은 이후로도 계속됐고, 결국 몇 년이 지나도록 신하들이 황제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급기야 관리들은 황제의 얼굴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신하가 사표를 몇 번이나 내도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서 참다못해 무단으로 낙향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상적이라면 황제를 능멸한 죄목으로 극형이 내려질 수도 있는 사안이었지만, 정작 만력제는 신하를 처벌하지도 만류하지도 않고 끝까지 방관했다고 한다.

또한 만력제는 관직에 공석이 생겨도 빈자리를 채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1607년 내각수보였던 이정기는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 "31명만 업무를 보고 24개의 주요 직책이 비어있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만력제의 파업은 해외에도 알려져 <조선왕조실록>에도 비판적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황제의 파업으로 인해 명나라의 사법체제도 마비됐다. 당시 생명을 다루는 재판은 황제의 재가가 필요했는데 만력제는 이마저도 외면했다. 명나라의 감옥에는 심문받지 못하고 수감된 죄수들로 넘쳐갔고 이중 다수는 무더운 여름에 찜통 같은 더위와 전염병에서 시달리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만력제의 장기 태업으로 30여 년 넘게 명나라의 국정 시스템이 붕괴된 시기를 만력태정(萬曆怠政)이라고 한다.

자기 무덤 건설에만 관심있던 황제
 
 방송 갈무리

방송 갈무리 ⓒ tvN

 
만력제가 그나마 열의를 보인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자기 무덤 건설'이었다. 만력제는 20대이던 1584년부터 천수산 인근 명당 자리에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6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5만 5000여 평의 부지에 매일 2~3만 명의 장정이 동원됐고 800만 냥(명나라 농민 65만 명의 1년 치 예산)에 이르는 국가 재정이 투입됐다. 하지만 정작 만력제는 1588년에 한 차례 무덤을 시찰한 것을 빼면 이후 30여 년간 자금성 밖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말년의 만력제는 매일 술을 마시고 만취하면 환관과 궁녀들을 학대해 가죽 채찍으로 때려서 죽였다. 황제의 손에 죽은 궁인들만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성격장애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처럼 명나라에 악영향을 끼친 만력제임에도 의외로 이웃 나라인 조선에서는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바로 조선의 최대 국가적 위기였던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지원군을 파병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 바로 만력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당시 명나라도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조정에서는 파병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고집불통인 만력제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한 일화에 따르면 만력제는 꿈속에서 관우(삼국지)가 등장하여 조선 파병을 강력하게 권유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만력제가 왜 자기 나라도 아닌 조선 파병에 그토록 열성적이었는지는 해석이 분분하다. 물론 전략적인 측면에서 보면, 명나라로서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할 경우 명나라 본토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 파병은 선제적 조치로서의 '예방전쟁'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다만 그동안 모든 국정에 무관심하고 상식적인 행보와는 거리가 멀던 만력제가, 이례적으로 일관성 있게 자신의 의지로 밀어붙인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그 속내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7년간의 전란 동안 약 17만에 이르는 대군을 파병했을 뿐만 아니라, 양곡 100만 섬과 은자 800만~최대 1700만냥(추정치)에 이르는 물자까지 원조해 줬다. 이는 조선이 전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지만, 한편으로 명나라에는 엄청난 재정적 부담으로 돌아왔다.

한편 명나라가 만력제의 파업과 국고 탕진, 임진왜란 파병 등으로 국력을 허비할 동안, 안으로는 농민들의 반란, 밖으로는 후금(훗날의 청나라)의 발호가 이어지며 나라의 국운은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만력제는 1620년 48년간의 재위 기간을 끝으로 긴 파업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 만력제 이후로도 명나라는 24년간 3명의 황제가 더 거쳐 갔고, 실제로 멸망한 것은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시기인 1644년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명나라는 이미 만력제 때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왔을 만큼 만력제가 명나라의 재정과 국방에 미친 악영향은 치명적이었다.

"군주는 백성의 근원이다. 근원이 맑으면 흐르는 물도 맑고, 근원이 흐리면 물도 탁해진다."

순자 <군도>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276년간 이어진 마지막 한족 통일 왕조였던 명나라는 통치자들의 무능과 기행, 그리고 권력에 기생했던 환관과 간신들의 득세 속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리 강대한 제국도 몇몇 지도자의 실책이 쌓여서 언제든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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