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스틸

<퍼펙트 데이즈> 스틸 ⓒ ㈜티캐스트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도시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은 하늘을 잘 보지 못한다. 아침에 부랴부랴 졸음을 박차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만원 버스와 전철, 혹은 늘 막히는 도로를 질주해 하루의 전투를 치러야만 한다. '저녁이 있는 삶'은 배부른 푸념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렇게 치열하지만, 소모적으로 하루를 근근이 보내는 터라 우리는 늘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주변의 사람들, 풍경들을 살피지 못한다. 아무리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다짐해 봐야 다음 날이면 도돌이표를 반복한다. 그런 삶은 사람을 소진시키게 마련이다.
 
대도시의 삶은 국경을 넘어 어딜 가나 비슷해졌다. 도시의 삶이란 게 언어나 일부 조건만 차이가 생길 뿐, 패턴은 별반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가꾸기보다는 타인의 척도와 사회적 기준에 매달리고, 허깨비처럼 남들이 갖춘 조건은 다 따라가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수동적이고 끌려가는 인생이 행복할 리 없다. 하지만 그렇게 컨베이어 벨트처럼 끌려가는 삶에서 과감히 궤도를 이탈하기란 두렵기만 하다. 한때 귀촌·귀농 열풍이 불기도 했지만, 금방 시들어버렸다.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 앞다퉈 소개되는 타인의 성공한 삶은 대체 내 주변에 보이지 않지만, 모두가 이를 추종하며 뒤처지면 안 된다며 비명을 지른다.
 
사실 그냥 나 자신이 그 나선 궤도를 벗어나면 끝날 일이지만, 묶인 게 많으면 말처럼 쉽지 않다. 직장과 학벌, 경제적 조건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결정되고 이에 따라 차별과 배제가 이뤄지는 사회라면 더욱 그럴 테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온통 불필요한 공회전에 몰두하는 형국이다. 막상 사회적 낭비가 심각한데도 다들 남이 뭘 사면 나도 사야 하고, 무슨 브랜드 하나는 갖춰야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다들 함께 골고루 불행 길이 열린다. 그래도 가끔 다른 삶을 상상하는 이들에게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진한 감동, 혹은 삶의 작은 위안으로 제 몫을 하고도 남을 작업이다.
 
중년 화장실 청소부의 반복되는 일상
 
 <퍼펙트 데이즈> 스틸

<퍼펙트 데이즈> 스틸 ⓒ ㈜티캐스트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어슴푸레한 아침 햇살이 밝아온다. 오래된 구도심 서민 동네 골목의 풍경이 희미한 빛과 함께 드러난다. 부지런한 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서 집 앞 주변을 청소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공동주택 2층 다다미방에서 잠을 청하던 중년 남성이 눈을 뜬다. 담요와 자리를 정리한 뒤 그는 1층으로 내려와 세면과 면도를 한 뒤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현관에 놓인 몇 가지 필수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마지막으로 잔돈을 챙긴 그는 문을 열고 하늘을 응시한다. 그런 다음 공동주택단지 한구석에 있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은 뒤 승합차에 오른다. 출근하는 길이다.
 
승합차에 탄 남자는 도쿄를 가로지르는, 마치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며 흐르는 한강과 같은 스미다·아라카와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난다. 중년인 그는 라디오나 mp3 대신에 차내에 잔뜩 놓인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한다. 아마 그가 청년 시절 즐겨 들었을 록과 팝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는 창밖 풍경을 응시하며 흐뭇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다. 어느새 일터다. 그는 차 안에서 이것저것 장비를 집어 든 뒤 근무지로 향한다.
 
남자는 화장실 청소부다. 시부야 거리 곳곳의 세련된 디자인 화장실들을 순회하며 꼼꼼하게 청소에 힘쓴다. 밤새고 술에 취해 비몽사몽이거나 바쁜 출근길에 급하게 화장실을 찾은 이들은 '청소 중'이라는 표지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업무를 방해하지만, 그는 싫은 내색을 드러내지 않고 씩 웃으며 급한 사정을 일일이 허용해 준다. 감사하다는 인사는 드물다. 남자와 어깨가 부딪히거나, 표지판을 넘어뜨리고 제 갈 길 가기 일쑤다. 어딜 가나 각박해진 세상이다.
 
동료 청소부가 뺀들거리며 지각 도착한다. 일하는 품새도 중년 남자와는 차이가 난다. 뭐 그렇게 열심히 하냐며 후임 청소부는 툭 던지지만, 남자는 굳이 대꾸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숨 돌린 다음에 번잡한 신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신사와 산책로 벤치에서 점심을 먹는다. 옆 벤치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회사원이건, 신사의 신관이건 남자는 먼저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벤치에서 울창한 나무를 보던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품에서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꺼내어 마음에 드는 찰나를 촬영한다.
 
일찍 일어나 이른 아침부터 일한 남자는 퇴근이 비교적 빠르다. 해가 떠 있을 때 퇴근한 그는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차를 놔둔 뒤 자전거를 타고 늘 반복하던 순서대로 목욕탕에 들러 하루의 노동을 훌훌 정리하듯 몸을 씻은 다음, 다시 번잡한 도심 지하상가 속 단골 식당에 들러 가볍게 식사와 한 잔 술을 청한다. 귀가한 다음 일터 곳곳에서 발견한 싹이 자란 화분을 돌보고, 자리에 누워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다시 전날과 같은 상황에서 눈이 떠진다. 그렇게 남자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 소소한 변화를 긍정하는 주인공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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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스틸 ⓒ ㈜티캐스트

 
그렇게 영화 속 남자의 일상은 12일간 반복된다. 그는 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거의 똑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꼼꼼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임무에 임한다. 바쁘고 고단한 일과 중에도 주변을 둘러볼 최소한의 여유는 가지려 애쓴다. 퇴근 후에는 정돈된 삶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달콤한 휴일에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다. 밀린 빨래를 하고 낡은 집이지만 청소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휴식시간에 틈틈이 촬영한 필름을 현상 맡기고 인화된 사진을 찾아와 점검한다. 헌책방에서 밤에 잠들기 전 읽어볼 문고판 서적을 구매하고, 단골 선술집에서 가볍게 한잔하는 게 휴일의 도락이라면 도락이다. 그런 남자의 일상은 복사해서 붙이기라도 한 듯 영원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박제된 것 같은 삶은 없다는 듯 영화는 미세하게 하루마다 일어나는 작은 사건과 변화를 그려낸다. 일은 대충대충 하면서 여자친구를 꾀는 데만 혈안이 된 젊은 후배는 남자를 자꾸 귀찮게 한다. 오토바이가 고장이 나자 남자의 승합차를 억지로 빌려달라 한다. 여자친구가 남자가 듣던 카세트테이프 음악에 관심을 가지자 슬쩍 몰래 테이프를 빼돌리거나,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친구와 거사(?)를 치르기 위한 유흥자금을 구하고자 남자의 (복고풍 유행 아이템으로 취급되는) 카세트테이프를 팔자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갑자기 오랫동안 만난 적 없는 어린 조카가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사이가 원만치 않은 여동생과 다툰 뒤 가출했다고 한다. 당황스럽지만 늦은 시간이라 일단 2층 침실에서 재우기로 한다. 남자는 1층 다용도실에서 새우잠을 청한다. 다음날 살금살금 작업복을 챙긴 뒤 출근하려는 그를 조카가 따라가겠다며 조른다. 조카는 삼촌의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다가 서툰 솜씨로 돕기도 한다. 일이 끝난 뒤 함께 목욕탕에 들르고 자전거로 도시를 관통하는 강을 건너던 중 함께 강 하구를 지나 바다를 보러 가자고 조카가 조르지만 남자는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이라며 미룬다. 여동생이 찾아오고 조카는 엄마 곁으로 귀가한다.
 
결국 후배 청소부는 아침 전화 한 통으로 일방적으로 일을 그만두고 잠적한다. 덕분에 남자는 '저녁이 있는 삶'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다. 평소와 다르게 해가 진 뒤 한참이 지나서도 그는 진땀을 흘리며 청소를 끝내지 못했다. 그의 일상이 무너질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는 드물게 업체에 항의하며 파트너를 구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아닌 게 아니라 일이 두 배가 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녹초가 된 남자는 그래도 일상 패턴을 포기하지 못한다. 다음 날 아침 마음을 다지며 출근길에 오른 그 앞에 신규 파트너가 기다린다. 그는 다시 웃음을 회복하고 평소대로 돌아온다.
 
소소한 일상을 회복했지만, 작은 변화는 계속된다. 그가 작업하는 화장실 중 한 곳에는, 마치 보물찾기 소품처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틈새에 '틱택토 게임'을 위한 손으로 그려놓은 종이가 끼워져 있다. 남자는 오목을 두듯 누군지 모를 상대와 매일 한 칸씩 채워가며 게임을 이어간다. 카세트테이프를 가져갔던 후배의 여자친구는 잘 들었다며 테이프를 반납하고, 작지만 놀라운 선물을 남자에게 전한다. 그답지 않게 깜짝 놀란 남자는 어쩌면 젊은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듯 싱글벙글한다. 그렇게 일상 속 변주는 꾸준히 이어진다.
 
자기만의 소우주를 지키며 안빈낙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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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스틸 ⓒ ㈜티캐스트

 
12일 동안 남자는 10일 출근하고 이틀의 휴일을 겪는다. 4일간 일하고 하루를 쉬었고, 또다시 5일간 일하고 하루를 쉰 다음 다시 출근길에 나서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게 전부다. 물론 작은 고비와 의외의 사건은 일어나지만, 극적인 '클라이맥스'라 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라 봐도 좋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주인공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체감하고 그의 과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참 기이한 영화다.
 
어떤 이들은 일본 특유의 '치유' 장르 변주라 짐작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당히 일상이 반복되며 소소한 재미를 코믹하게 그려내는 양산형 치유물과는 궤를 달리한다. 오히려 일본 다도 등에서 중시되는 특유의 '와비사비(わびさび, 투박하고 조용한 상태)' 정신을 도쿄 도심 한복판에서 재현한다면 모를까. 검소하고 정적인 표현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특유의 미의식은 일정한 결핍이 배경이 될 때 극대화되는 특징을 지닌다. 그저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소품이나 행위로 봉합하는 게 아니기에 더 수양에 가까운 형태다.
 
주인공의 일상을 봐도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후배에게 유흥비를 빌려준 다음 귀가 도중에 평소와 다른 장거리 주행 탓에 기름이 떨어지자 당장 현금이 없는 (아마 카드도 없을 듯) 남자는 조금 전엔 단호하게 중고 레코드 가게에 팔기를 거부하던 카세트테이프를 1개 팔아서 겨우 귀가할 수 있다. 100엔 문고판 서적도 싸다고 마구 지르지 않는다. 꼭 읽을 만한 것만 1권씩 구입해 공들여 꼼꼼하게 매일 밤 읽던 책의 남은 분량을 파악해 놓는다.
 
그가 읽는 책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영문학의 높은 산봉우리 중 하나인 윌리엄 포크너의 장편소설 <야생 종려나무>와 <리플리> 시리즈로 너무나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집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11'>, 그리고 (일본 여류작가) 코다 아야의 에세이 수필집 <나무>다. 전통과 고향에 대한 향수, 평온하게만 보이는 일상 속 미묘한 심리에 대한 예리한 관찰, 그리고 사라져가는 생활 습관과 풍물에 대한 박력 있는 묘사로 정평이 난 이야기들이다. 단골 헌책방과 선술집의 주인장은 그런 남자에게 '지적'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에 주저가 없다.
 
하지만 책보다 더 남자의 문화적 소양과 기호가 진하게 묻어나는 건 출퇴근길에 그가 재생하는 음악 리스트다. 남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배 세대 중 팝 음악 좀 즐겨 들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귀에 낯익은 명곡들이 줄줄이 등장하기에 관객은 어느새 남자의 하루가 돌아오면 오늘은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 기대하게 될 정도로 선곡이 탁월하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애니멀스의 명곡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다른 형태로 중반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오티스 레딩과 (직장 후배의 여자친구가 처음 듣고 감상에 푹 빠지고 마는) 패티 스미스가 뒤를 잇는다.
 
이걸로 끝날 리 없다. 롤링 스톤즈와 더 킹크스, 밴 모리슨, 니나 사이먼의 명곡들이 마치 중년 남자가 관객을 위한 DJ로 플레이 리스트를 꾸며놓듯 순차적으로 흘러나온다.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면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절로 손이 갈 법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목에 반영된 루 리드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곡들이 압권이다. <접속> 삽입곡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Pale Blue Eyes>와 <Perfect Day>가 귓가에 아련히 맺힌다. 그 음조를 듣는 남자의 표정은 그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기를 거부하는 투쟁처럼 묵직하고 다채롭다. ost와 장면의 조화가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반드시 음향이 잘 된 극장에서 관람해야 할 영화다.
 
획기적 공공건축 프로젝트에 예술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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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스틸 ⓒ ㈜티캐스트


놀랍게도 이 영화를 연출한 이는 일본인이 아니다. <베를린 천사의 시>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세계적 지명도를 가진, 독일의 '거장' 칭호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감독, 빔 벤더스다. 그는 도쿄를 배경으로 3주 만에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단 17일 동안 촬영해 영화를 완성했다. 그렇게 한동안 극영화로는 범작과 평작만 양산하던 감독의 부활을 알린 작품이 되었다. 로드무비의 대가이긴 하지만 온전히 도쿄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처음이다. 낯선 환경에서 <퍼펙트 데이즈>를 작업하게 된 데에는 전혀 예상하기 힘든 배경이 있었다.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다.
 
영화의 주요 무대인 시부야구의 공공 화장실 수리 및 개선 프로젝트, 'THE TOKYO TOILET'으로 총 17개소의 실제 화장실을 공공건축의 대가들이 분담해 작업한 결과물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기획으로 초청된 감독은 안도 다다오와 구가 겐고 등 초호화 건축가 진용의 솜씨가 발휘된 그 자체로 공공예술품이라 할 화장실들을 배경 삼아 속전속결로 극영화를 만들기에 이른다. 감독이 21세기 들어 상대적으로 호평을 얻었던 <피나>나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같은 다큐멘터리를 예상했던 관계자들의 허를 찔러 감독은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극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원래의 목표인 공공 화장실의 다양한 단면과 개선의 성과를 만천하에 과시할 만한 공들인 세부묘사는 전혀 모자람이 없다.
 
안 그래도 화장실 디자인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인상을 남기나 했더니, 역시 대가들의 창안이 장난이 아니다. 그저 디자인을 근사하게 조성하는 것을 넘어, 근래 한국 사회 내에서 툭하면 온라인 설전이 벌어지는 성 중립 화장실 개념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콘셉트가 개별 화장실에 공통으로 적용되어 있다. 뭐가 확실히 틀리게 보이긴 했다. 도시건축이나 공공행정 관계자들이 유심히 살펴봐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공짜로 해외연수 안 가도 되도록 해주니 말이다.
 
<퍼펙트 데이즈> 속 공공 화장실, 그리고 남자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대도시 도쿄의 공간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미래의 공존과 조화를 예비하는 풍경이 한데 어우러진다. 영화 속 도시에는 구도심과 신도심이 강을 경계로 서로의 영역을 고수하고, 헌책방과 대중목욕탕, 녹지와 사원이 건재하지만, 혁신적 설계의 공공건축과 스카이트리로 상징되는 도시의 마천루 불야성도 어엿하게 자리를 차지한다. 갈수록 닮아가는 세계 유수의 대도시들에서 참고할 건 참고하고 배울 건 배워야 할 테다. 영화 속 풍경 중 본떠서 우리 주변에 추가하고 싶은 게 제법 많다.
 
일본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와 비범한 연기자들의 화룡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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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스틸 ⓒ ㈜티캐스트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 속 그 남자, '히라야마'의 고즈넉한 삶의 태도가 관객의 뇌리에 가장 깊숙하게 남을 테다. 물론 그는 돌부처처럼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는 매우 유복한 가정환경을 버리고 홀로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며 사회적으로 결코 우대받을 리 없는 화장실 청소부의 삶을 택했다. 딸을 찾으러 온 그의 여동생과 남자의 행색은 너무나 대조된다. 아마 그는 다른 굴곡도 많았겠지만, 부모와 불화가 컸던 듯하다. 오랜만에 가족의 근황을 듣고 난 히라야마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감정의 동요를 관객에게 노출한다.
 
인생을 달관한 듯 보이지만 아직 그에겐 욕망도 남아 있다. 다만 삶의 경험과 축적한 지식으로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그에게도 속내가 있고 가끔 타인에게 들키는 순간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소박한 일상에 만족하며 이미 인생에서 상처와 쓴맛을 적지 않게 경험했을 그는 약간은 소심할 정도로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그런 미세하지만 감정이 묻어나야만 하는 섬세한 연기를 해낼 배우로 빔 벤더스 감독은 최상의 승부수를 던진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성공적인 결과로 그 선택이 최선임을 증명한다.
 
바로 일본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가 주인공이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연극에 투신해 인사하는 법부터 시작했다는 그는 1990년대 이후 40년째 자국에서 연기파 배우로 정점에 머무는 존재다. 영화는 그런 대배우의 소박한 일상적 면모와 극 중 배역을 가능한 닮은 꼴로 구성해 자연스러움을 극대화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절묘하게 현실의 삶과 영화 속 연기가 도쿄를 관통하는 두 강의 지류가 뒤섞이듯 결속된다. 무슨 역할을 맡기건 기대 이상으로 찰떡궁합을 보이는 배우이지만 이 영화처럼 실제 인물과 큰 차이가 없는 캐릭터라면 더 미세한 조정이 가능할 테다. 그 진가는 영화에서 확인하시라.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믿고 보는 연기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을 관객은 화면에서 줄곧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 연기자 가문 중 하나인 에모토 집안의 둘째 '토키오'가 뺀질뺀질한 요즘 세대의 스테레오 타입 후배 청소부로, 그의 여자친구로 시대를 초월한 음악 취향으로 히라야마를 살짝 놀라게 하는 배역은 무용가이자 연기자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개성파 배우 '야마다 아오이'가 맡았다. 전혀 서로 대화하진 않지만, 히라야마와 같은 형태의 삶, 다수가 끌려가는 일반적 유형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고수하는 홈리스로 세계적 무용가이자 연기파 배우인 '다나카 민'이 주인공과 무언의 교감을 나눈다.
 
하지만 정말 거물급은 뒤를 이어 등장한다. 히라야마가 휴일에 들르곤 하는 선술집 주인은 일본의 전설적 가수 '이시카와 사유리'가, 그리고 그와 모종의 관계가 있고 히라야마와 강변에서 기이한 우정을 쌓는 중년 남자로는 또 다른 국민배우 '미우라 토모카즈'가 깜짝 등장한다. 잔잔한 영화라 그저 소소하게 감상하던 이들에겐 반가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히라야마와 그가 벌이는 강변에서의 그림자 잡기 놀이는 곧 이 영화의 주제의식,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도, 똑같은 것도 없다는 삶의 소박한 철학을 구현하는 일화로도 훌륭하게 기능한다.
 
그렇게 소소하지만 분명한 형태로 스미다 강처럼 유유히 흘러가던 영화는 12번째 날 출근길의 히라야마 얼굴을 클로즈-업 해가며 종막으로 향한다. 그가 짓는 표정과 어우러지는 음악에 맞춰 천천히 늘 보던 출근길 풍경이 (4:3 화면비의 효과를 극대화하며) 인물의 얼굴로 집중될 때 우리는 그가 2시간 넘게 영화 속 시간을 통해 보여준 삶의 소소한 사건 사고들을 뛰어넘어 풍진 세상을 견뎌온 이의 삶 전체를 압축해 전달받은 느낌에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 지쳐 무의미하게 지나치던 일상의 시간과 풍경을 되돌아보게 될 테다.

주인공이 고단한 노동 중 찰나의 휴식 중에 늘 포착하던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의 찬란함을 기억한다면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작은 '마법'을 가능케 해주는 비범한 영화다. 그야말로 '아날로그'와 '느림의 미학'이 형태를 갖춘 것 같은 작품이다.
 
<작품정보>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2023│일본│드라마
2024.07.03. 개봉│124분│12세 관람가
감독 빔 벤더스
주연 야쿠쇼 코지(히라야마 역)
출연 에모토 토키오(타카시 역), 나카노 아리사(니코 역), 다나카 민(홈리스 역),
미우라 토모카즈(토모야마 역), 이시카와 사유리(마마 역), 야마다 아오이(아야 역),
아소 유미(케이코 역)
수입/배급 ㈜티캐스트
 
2023 76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야쿠쇼 코지), 에큐메니컬상(빔 벤더스)
2023 16회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 최우수작품상
2023 몬트칼레어영화제 주니어심사위원상
2023 97회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일본영화 2위, 일본영화 감독상, 남우주연상(야쿠쇼 코지)
2024 47회 일본아카데미상 감독상, 최우수남우주연상(야쿠쇼 코지)
2024 17회 아시아필름어워즈 남우주연상(야쿠쇼 코지)
퍼펙트데이즈 빔벤더스 야쿠쇼코지 다나카민 미우라토모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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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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