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소룡-들> 포스터 이미지

영화 <이소룡-들> 포스터 이미지 ⓒ (주)에이디지컴퍼니

 
'이소룡 신드롬'의 파급효과와 그 실체
 
이소룡/브루스 리는 생전 단 4편의 영화를 남겼다(유작으로 1편이 추가되었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그리고 사후 공개된 <사망유희> 이상 5편이다. 이 중 <사망유희>는 실제 당사자 출연 분량이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서구권에서 거의 최초의 동양인 액션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런 덕분에 한동안 서양에서 중국인은 무술에 능하다는 환상이 전파되었을 정도다. 이소룡은 현재도 퇴색되지 않은 대중문화의 아이콘(상징)이 되었고, 그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특유의 동작이나 패션은 국경을 초월해 유행하는 중이다. 어쩌면 제임스 딘이나 요절한 천재 예술가들의 또 다른 전형에 속한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소룡의 5편 출연작(사실상 특별출연에 불과한 유작을 빼면 4편)을 골고루 다 챙겨본 이는 거의 드물다. 이소룡의 작품들은 영화적 완성도보다는 하나의 캐릭터 형상화 덕분에 시간을 초월한 생명 연장에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을 테다. '절권도'라 불리는 고유의 무술, 노란색 운동복에 딱 붙는 고도로 단련된 근육질 몸매, 형형한 눈빛과 매력적 외모, 특유의 '아~뵤!' 괴성과 간결하지만 빠르게 연속되는 타격 액션, 그리고 쌍절곤을 휘두르며 압도적인 다수의 악당이나 거구의 서양 무예가들을 물리치는 정형화된 전개다. 영화의 내용보다는 특정한 상황 설정과 배우의 캐릭터 매력이 결정적 요소다. 마치 오늘날 '마동석 유니버스'의 원조 격이다. 이소룡이 있었기에 훗날 액션 스타들이 중심이 된 일군의 장르 영화들이 연이어 탄생할 수 있었고, 스티븐 시걸이나 장 클로드 반담 같은 이들이 빛을 봤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이소룡'이라는 현대의 신화가 가진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소룡이 실제 주연한 영화가 몇 편 되지 않는데도 머릿속에선 그의 영화가 수십 편은 가뿐히 넘는 착시에 빠지곤 한다. 물론 이소룡 캐릭터에 영향을 받았거나 흠모하는 취지로 모방한 작업도 적지 않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킬 빌> 시리즈에서 주인공 '키도'(우마 서먼)는 노란색 운동복을 착용하고 이소룡이 수련했던 것과 유사한 쿵푸 동작을 연마한다. 주성치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림축구>에서 주인공이 속한 축구팀 골키퍼는 이소룡의 부인도 남편과 너무 닮았다며 놀랄 정도의 외모를 가진 배우 진국곤이다. 그는 이소룡과 흡사한 캐릭터 역할 전문으로 정평이 나 있다. 비슷한 사례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그 광대무변한 확장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이소룡이라는 '신드롬'이 형성되기 위해서라도 그의 4편에 불과한 주연작은 양적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데 대중의 착시에는 참작해봐야 할 이면의 진실이 감춰져 있는 바, 바로 이소룡을 모방한 무수한 아류작의 존재다. 이소룡과 비슷한 외모와 캐릭터로 그의 대표작들의 번외편처럼 판박이 꼴로 무한복제된 영화들은 비록 양지로 올라와 찬사를 받는 게 불가능하지만, 이소룡이라는 '아이콘'을 대중이 잊지 않고 기억하며 '브랜드' 확대 재생산에 결정적 영향을 행사했다. 그 영화 속에 양산된 '짝퉁' 이소룡 중 몇몇은 이소룡의 그림자 안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각자의 족적을 남기며 기억 속에 간직되는 특별한 기회를 얻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이소룡-들>은 그런 '이소룡(들)'을 소개하고, 이소룡의 영화를 복사해 붙인 것 같은 일련의 영화가 탄생한 배경과 그 평가를 진행하는 작업이다.
 
'브루스플로테이션' 속 '이소룡-들'과의 신기한 재회
 
 영화 <이소룡-들> 스틸 이미지

영화 <이소룡-들> 스틸 이미지 ⓒ (주)에이디지컴퍼니

 
물론 아류 혹은 복사판을 논하려면 최초의 기원, '오리지널' 이소룡을 먼저 언급해야만 된다. 그 통과의례는 영화 시작과 함께 이소룡의 출연작과 뜻밖의 죽음까지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생전 마지막 출연작 <용쟁호투>가 미국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이소룡이지만, 새로운 영화가 더 나올 수 없는 상황.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눈 앞에 펼쳐질 것 같은 큰 이익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지만, 제작/배급사는 금단의 흑마술을 떠올리고 만다. 서양 백인들이 한국인-중국인-일본인을 잘 분간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이들은 이소룡과 닮은꼴 액션배우를 발굴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소룡-들'의 탄생배경이다.
 
영화는 주로 4명의 '이소룡-들'을 조명한다. 대만 출신 '허쭝다오'는 이소룡의 영문 이름인 브루스 리를 모방한 '브루스 라이'로 영화에 출연한다. 이소룡 추모에 편승해 당시 우후죽순으로 제작되던 전기영화에서 이소룡 역할을 맡으며 주로 서구권을 겨냥한 '브루스 라이'는 주목받는다. 그와 함께 표절 시비에도 휘말린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브루스 라이는 이소룡의 대역에 도전한 유일한 사례가 아니다. 곧이어 여러 '이소룡-들'이 곳곳에서 머리를 쑥 내민 것이다. 홍콩영화의 제작단가가 높아지고, 원활히 사용할 수 있는 촬영장소가 부족한 상황에서 당시 한국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건비와 활용 가능한 야외촬영장소 등으로 합작영화 사업의 총아가 되었다. 그 시절 한국의 사찰이나 민속촌을 배경으로 제작된 홍콩 무협 영화가 적지 않은 이유다. 그중 '거룡'은 한국인으로서 이소룡을 연기하며 명성을 날린다.
 
이번엔 화교가 많은 버마(미얀마) 차례다. '황건룡'은 '여소룡'이란 이름으로 쿵푸 스타로 올라선다. 연기뿐 아니라 연출과 제작까지 서구의 여러 제작자 및 감독들과 합을 맞추며 활약한다. '브루스 라이'의 뒤를 이어 액션 스턴트 출신으로 두각을 드러낸 '양소룡' 역시 그만의 족적을 남긴다. 이외에도 이소룡 생전 출연작에서 그와 상대하는 경쟁자였거나, 대역으로 활동했던 이들 역시 이런 아류작 유행 덕분에 몸값이 오르며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게 된다. 여성 무예가 '모영'은 이소룡의 여동생으로 홍보되며 몸을 날리는 연기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이소룡 열풍은 마침내 신비로운 동양인 무술가의 캐릭터 성격도 초월하기에 이른다. 미국사회에서 이소룡의 활약은 차별당하던 흑인 청년들에게 큰 매력을 끌었고, 그 결과 흑인 이소룡, '흑룡'이 탄생하게 된다. 그런 확장은 마치 눈사태가 한없이 확대되는 것 같았다.
 
'흑룡'의 탄생과 함께 장르영화 붐과 결합한 이소룡-들 영화는 이제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된다. 앞을 다퉈 이소룡의 이미지를 소비하던 이런 영화들은 마침내 금도를 넘어서기에 이른다. 이소룡은 죽었다 부활하기도 하고, 사후세계에서도 무예 대결을 펼치게 된다. 장르도 천변만화를 겪는다. 이소룡은 코미디, 로맨스,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으로 속속 변신하고, 총이나 검을 들고 기존의 캐릭터와 무관한 존재로 변신한다. 좀비나 흡혈귀와 맞붙고, 금발의 백인 미녀와 멜로 장면을 연출한다. < 007 > 제임스 본드나 슈퍼히어로 역할에도 도전한다. 심지어 복제인간 클론으로 평소 만나기 힘들던 '이소룡-들'이 동시에 출연하는 '클론'들이 향연도 벌어진다. 그렇게 거대한 규모를 형성한 <이소룡-들>의 영화세계는 '브루스 리'+'블랙스플로테이션'으로 대표되는 3류 액션 영화를 조합한 '브루스플로테이션' 장르로 일컬어지게 될 정도였다.
 
이소룡 세계화의 진정한 주역으로 복권되는 '이소룡-들'
 
 영화 <이소룡-들> 스틸 이미지

영화 <이소룡-들> 스틸 이미지 ⓒ (주)에이디지컴퍼니

 
이소룡이 사망한 1973년 직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소룡-들'이 활약하는 영화들은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진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주인공 격으로 출연하는 '이소룡-들'의 대표 배우들을 목격하고 있다 보면, 기성세대의 경우 어릴 적 비디오로 몰래 보던 추억의 이름들을 나이 먹은 모습과 견줘가며 감회에 젖고 말 테다. 대개 1940~1950년대 생이니 70줄은 기본 진입한 셈이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만, 무도가 출신들답게 의외로 동안에 다들 정정하다. 그런 이들의 활약이 주춤하기 시작한 것도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바로 이소룡 생전에 그와 합을 맞춰 무명의 스턴트맨 혹은 엑스트라로 등장했던 신세대 무도가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그들을 대체하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과 얼굴들 차례다. 실제로 이소룡이 장래성을 보고 격려하며 도움을 주곤 했던 홍금보와 성룡, 원표 등의 시간이 도래한다. 홍금보는 지금보다 날렵하고 날카로운 인상, 성룡은 이소룡과 결이 다른 코믹한 액션 연기로 각자의 전성기를 향해 달려간다. 과도하게 펼쳐진 아류작들은 이소룡의 브랜드를 활용하려는 유가족과 판권사에게 제동이 걸리며 차츰 사양길을 걷게 된다. 그런 와중에 이소룡의 촬영 분량을 포함해 유작으로 홍보된 <사망유희>가 공개된다.
 
기이한 것은, <이소룡-들>의 상징적인 배우들이 공식 유작임에 분명한 <사망유희>의 졸속적인 완성도에 분개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비록 상업적 용도에 의해 짝퉁으로 연기했지만, 개별 배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소룡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누구보다 더 깊게 간직하던 이들이기에 자신들이 비록 복제판 영화 양산에 일조하고 있음에도. 공식 유작의 형편 없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엔 그저 조악한 복제에 불과할지언정, 그들 각자가 이소룡에 대한 경의를 담아서 독자적으로 선보이고자 한 시도와 노력이 언급된다. 쌍절곤을 사용하더라도 독창적인 기술을 연마하고, 무술 액션을 위해 피가 흘러도 대충 드레싱만 한 뒤 계속 몸을 날려가던 추억을 회고한다. 아류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 역시 이소룡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의 한계를 아쉬워하면서도 '오리지널'에 대한 예의에 충실했던 셈이다.
 
이소룡 영화에 정통한 홍콩과 중화권, 미국과 프랑스의 영화인과 평론가들이 그런 '이소룡-들'의 기여와 성취에 대해 심층 분석을 시도한다. 이소룡 신드롬의 상당한 지분은 바로 무명의 '이소룡-들'에게 있다는 것. 그들 중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려 한 이들의 노고가 결코 조악한 복제로만 치부될 수 없는 성과를 이뤘다는 것, 그리고 이소룡 현상의 세계화는 바로 '브루스플로테이션'의 결과라는 분석이다.
 
현대 대중문화 현상에 대한 깊이 있고 따스한 시선의 결실
 
 영화 <이소룡-들> 스틸 이미지

영화 <이소룡-들> 스틸 이미지 ⓒ (주)에이디지컴퍼니

 
그런 '이소룡-들' 탄생과정은 역시 돈 문제였던 태생적 한계를 부정할 수 없다. 이소룡의 전기물을 표방한 숱한 작업이 고인 능욕에 가까운 처참한 수준의 왜곡과 부실한 수준에 머물렀던 점, 저작권 규정이 현재처럼 정돈되지 않았던 제도를 악용한 선정적 현혹이 난무하는 홍보 카피, 그리고 배우를 착취하기 위해 1편을 촬영하고 편집 짜깁기를 통해 2편으로 증식시키는 '흑마술'은 '이소룡-들'의 책임이 아니라 돈맛을 본 제작자들의 무분별한 채근 탓이다. 미국과 프랑스의 소규모 배급자들 역시 그런 이상 현상에 편승해 막대한 이익을 봤다. 정작 짝퉁이란 이유로 배우들은 상대적인 박봉, 혹은 이소룡에 대한 경외감으로 '페이컷'을 허락했던 것과 대비되는 면이다.
 
결국 온갖 욕망이 뒤섞인 '이소룡-들'의 영화 붐이 저물었지만 기억과 사람은 남았다. 그 여백은 이소룡과는 차별화된 차세대들이 물려받아 독자적인 경지를 향해 나아갔다. 이소룡의 복제로 출발한 액션 스타들의 이후 활동과 현재 모습은 거의 대동소이하게 닮은꼴이다. 건강에 무리가 와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무예를 살려 접골사가 되거나, 극장을 운영하며 제작자가 되었거나, 여전히 현역으로 연기 활동을 펼치며 과거의 열정과 이소룡에 대한 흠모를 해설하던 왕년의 히어로들이 여전한 발차기를 선보이는 찰나는 뭉클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엔 그 조악함에 포복절도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 다채로운 결에 놀라게 되고, 나중에는 그들의 진심에 감화받고 말 테다. 
 
수많은 과거의 '이소룡-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건 화려해 눈이 부신 동시에 반가운 재회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애석하게 이른 죽음을 맞은 오리지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이소룡을 떠올리기 위해 아류라 욕만 먹던 그들의 조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인종과 성별을 초월해 이소룡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통쾌한 일격의 쾌감은 공유되고 있으며, 짝퉁들의 보상받지 못한 분투 역시 이제는 재평가될 만한 풍부한 유산의 일부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감독은 웅변하고자 했던 것 같다. 르네상스의 천재들 때문에 벽에 부딪혔던 후예들이 '매너리즘'이란 사조로 박제되었지만 향후 일정한 재평가에 이르렀던 것처럼 말이다.
 
<작품정보>
이소룡-들 ENTER THE CLONES OF BRUCE
2024│미국│다큐멘터리
2024.06.19. 개봉│95분│15세 관람가
감독 데이빗 그레고리
출연 이소룡, 여소룡, 허쭝다오(브루스 라이), 거룡(드래곤 리), 양소룡
수입/배급 (주)에이디지컴퍼니
 
56회 시체스영화제
22회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
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43회 하와이국제영화제
이소룡들 데이빗그레고리감독 양소룡 거룡 브루스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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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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