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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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꿈많던 소녀 유관순의 인생을 하루아침에 바꾸게 되는 운명의 순간이 찾아온다. 유관순이 16세가 된 1919년, 대한민국의 황제 고종이 돌연 서거한다. 일제는 공식적으로 고종의 사인이 뇌출혈이라고 발표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고종이 일제에 독살당했다고 생각하며 분노했다.
고종의 장례식이 치러지기 이틀 전인 3월 1일, 경성을 포함한 7개 도시에서 조선인들이 삼삼오오 운집하며 만세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3.1 독립만세 운동(三一運動)'의 시작이다. 특히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주역은 바로 어린 학생들이었다.
김복희 지사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정 밑에서 고통과 굴욕을 밥먹듯이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신학문을 배우던 당시 이화학당 학생들의 반일감정은 정말로 날카로웠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이화학당은 학생들이 위험에 처할 것을 걱정하여 교문을 닫고 시위 참여를 막았다. 하지만 유관순을 비롯하여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 등 다섯 명의 여학생들은 학교 담장을 넘어 탈출하며 기어코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을 가리켜 이른바 '5인의 결사대'로 부른다.
유관순과 학생들은 고된 시위에 지친 상황에서도 수많은 인파속에서 만세의 전율을 맛보며 벅찬 감동을 느꼈다. 유관순은 그로부터 4일 뒤인 3월 5일 남대문에서 벌어진 학생연합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시위 확산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은, 이때부터 군중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강경 진압하기 시작했다. 3월 10일이 되어 총독부는 학생들이 시위를 주동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조선 전국의 학교들에 임시휴교령을 반포한다. 학교 기숙사가 문을 닫으면서 유관순도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온다.
유관순은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 유중원과 용두리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고향에서 또다른 만세 시위를 기획했다. 1919년 4월 1일 시위 장소였던 아우내 장터에는, 놀랍게도 무려 3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운집했다.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로 나아갔다.
하지만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비무장 상태로 평화 시위를 하던 참여자들을 향하여 총검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만세운동의 현장은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학살의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일본의 만행에 항의하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도 현장에서 총탄을 맞아 함께 즉사했다. 눈앞에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유관순은 "내 나라를 되찾으려는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전쟁에서 쓰는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를 죽이느냐"라며 울부짖었다.
일제는 '아우내 장터 학살사건' 이후 2주 뒤인 4월 15일에는 화성시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가둔 뒤 총탄을 퍼부어 집단으로 살해하고 방화까지 저지르는 대학살을 일으켰다. 이는 일본인 학교와 주재소를 습격한 조선인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성 학살이었다.
2주 전 만세 운동이 일어난 장소였던 발안장터에서 가장 인근에 위치한 마을이었던 제암리가 본보기 차원에서 타깃이 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주민 30여 명이 살해되고 민가 30여 채가 소실됐다.
또한 일본군은 인근의 고주리로 넘어가 독립운동가 김흥렬 지사와 그 일가족 6명을 또다시 잔혹하게 살해했다. 일제에 은폐될 뻔했던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은 외국인 기자와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뒤늦게나마 국제사회에 진실이 알려질 수 있었다. 현재 제암리 사건 현장에는 당시의 독립운동 역사를 간직한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이 설립되어 올해 4월 개관 예정이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1일 <독립신문>에 올린 기고문에서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을 언급하며 '이날에 희락하고 놀 뛰는 자여, 이 광경을 잊지말라'고 부르짖었다. 조국의 현실을 외면한 이들에게 일제의 끔찍한 만행을 잊지 않을 것을 촉구하며,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기 전까지는 언제든 제암리 사태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와 같은 사람을 다시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