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동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위치한 화수동
감 픽쳐스
교회 1층에는 교회 사무실, 주방, 그리고 방이 있었다. 선교원에서 지급한 비용으로 재료를 구매해서 조리한 식사를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설거지까지 마치는 1일 식사 당번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드나들면서 어린이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보게 되고,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라는 체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또 식재료를 직접 구입하고 정리하면서, 선교원의 재정 상황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을 매달 자모회의에서 논의하고 검토하면 선교원 운영 전반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모들은 주변 회사나 부두에서 일하거나 파출부 일도 나가니까 월 1회 휴가를 내서 선교원 봉사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모 얘기를 하니,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두 번째 자모 회의를 했던 날의 기억이다. 첫 자모 회의 때 선출된 자모 회장이 진행하고 총무가 기록하는 자리였다. 첫 번째 안건은 가을소풍이었다. 먼저 어디로 갈 것인지 의논하기로 했다.
"그야 두 말 할 것도 없이 송도지."
부두에서 조개를 까고 굴 채취 작업을 하는 상희 엄마가 씩씩하게 말했다.
"아우, 야! 송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애들 잃어버리기 딱 좋아. 안 돼!"
"어엇쭈? 이게 자모회장 됐다고 눈에 뵈는 게 없네? 야! 너 잘 만났다 이년아!"
벌떡 일어난 상희 엄마가 쏜살같이 달려들었고 둘은 엉겨붙어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온 몸의 세포가 정지된 것처럼 굳어있었다.
"아이고, 이년들아. 그만 싸워! 너네는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냐. 야! 선상님 또 서울로 도망가시면 으쩔라고 그라냐?"
얼마 전 회사에서 해고되어 잠깐 교회 점심식사를 돕고 있던 연진엄마가 나섰다. 두 사람은 그 말에 갑자기 조용해지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이구 선상님, 제에송합니다요. 지가 워어낙, 사는 게 힘들다 보니 승질도 급해졌고요. 요, 주둥이에 욕이 줄줄이 매달려졌어요. 선상님, 서울 안 가실거쥬?"
상희엄마는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아양까지 떨었다. '아, 사는 게 힘들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다 보면 저렇게 된소리 센 소리라도 내질러야 숨을 쉴 수 있는 거구나! 그렇다면 선배가 그렇게 싫어하던, 교회 드나드는 젊은이들의 거친 말투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민들레 어린이선교원' 생활이 반년 지나 새 학기가 되었다. 신입생 모집을 했는데, 소문이 나서 지원자가 많이 몰렸다. 우리는 설립 원칙에 따라 부부가 일하는 가정 중에 형편이 더 어려운 가정의 아이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가정 방문을 거쳐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가정 방문이라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그날도 일과를 끝내고 좁은 비탈길을 올라 전봇대 앞에 잠깐 멈춰 숨을 골랐더랬다. 이쯤 어디인 것 같은데... 하며 다닥다닥 엎어져 있는 동네를 둘러보았다. 아직, 초가지붕도 있구나. 그런데 저 건너편 쌀가마니는 뭐지? 하는데, 그때 바로 그 거적때기를 들추고 구부정한 할머니가 나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뜨끔해서 엉겁결에 말을 건넸다.
"저기, 혹시 여기 김성춘네 집이 어디...?"
"아, 선상님이시쥬? 지달렸구만. 느추하지만, 어여 들어오슈."
할머니는 거적때기를 들추어 내가 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셨다. 황송한 마음에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니, 부뚜막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불을 때서 밥을 하시는구나?' 속으로는 놀랐지만, 애써 밝은 목소리로 상담했던 기억이 지금도 총총하다.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에 가게 됐을 때, 자모들은 헤어지기 싫다고 했다. 그렇다면
졸업생 엄마들끼리 친목회를 만들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졸업하는 햇수에 따라, 또 졸업하는 인원에 따라 83친목회, 85친목회, 86, 88, 89, 90 친목회가 생겼다.
86년 겨울, 약간의 보육료와 해외의 후원금으로 운영하던 선교원이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친목회들은 '민들레 후원회'를 결성하고 공간 마련과 운영을 위해 수익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모아 온 빈 병이나 헌옷을 팔았는데, 수익이 별로 없자 과일 잼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또 일일찻집을 하거나, 삼계탕, 곰탕 등을 만들어 팔고 동네에 먹거리장을 열어서 김밥부터 부침개, 국수까지 정말 안 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였다. 주변의 인맥을 동원해서 모금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민들레 공간이 마련되었고, 그 공간은 낮에는 취학 전 아이들을 돌보는 어린이집, 오후 5시부터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아이들이 없는 주말과 저녁 시간은 엄마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민들레집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