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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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파소는 고려 말의 신돈처럼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상태에서 전격 등용됐다. 이런 인물이 소신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군주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국천태왕과 을파소의 '케미'는 성격이 까다롭고 칭찬을 가급적 아끼는 역사학자 신채호의 푸짐한 호평에서도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극찬했다.
"뜻이 맞는 임금을 만난 것에 감격한 을파소는 지극정성으로 국정을 수행했다. 상벌을 신중히 처리하고 법령을 엄격히 하니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그래서 고구려 9백년 역사에서 최고의 재상으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드라마 <우씨왕후>의 전투신은 고국천-을파소 조합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우씨왕후>에 묘사된 것처럼 고국천태왕이 죽기 얼마 전까지 전쟁터에서 살았다면, 아무런 기반이 없는 을파소가 홀로 도성에 남아 개혁의 성과를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을파소는 개혁 의지와 비전은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정치적 자원은 전혀 없었다. 신채호가 강조한 것처럼 "뜻이 맞는 임금"이 곁에 있었기에 그의 개혁은 성사될 수 있었다. 을파소의 최대 후원자가 전쟁터에 몇 년씩 나가 있었다면, 을파소는 개혁은커녕 정치적 생존도 도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씨왕후>에서 강조된 것처럼 태왕이 전쟁터에 직접 나가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편은 태왕이 재위 6년인 184년에 한나라의 침공에 맞서 직접 참전했으며 "목을 벤 것이 산처럼 쌓였다"고 할 정도로 대승을 거뒀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왕권의 위협이 생길 정도로 태왕이 수년간 도성을 비웠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아무리 픽션이라고 할지라도 실존인물을 소재로 한 사극에서 너무 과장된 스토리를 전개하면 역사왜곡 논란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고대 전쟁에서는 영토 확장보다 노동력 확보가 더 중시될 때가 많았다. 영토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하고 이것이 세수 증대에 지장을 줄 경우에는, 상대방 영토를 빼앗은 뒤 그곳 백성들만 끌고 귀환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국천태왕은 국가재정의 확충으로 연결되는 이 같은 외국 노동력 확보에서도 큰 성과를 거뒀다. 유비와 조조 등의 활약으로 중국이 혼란스러울 때인 197년에 대륙의 혼란을 피해 고구려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고 <삼국사기>는 말한다.
이때 태왕은 전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이들을 수용했다. 영토 확장 못지않은 성과를 거둔 것이다. <우씨왕후>는 고국천태왕을 광개토태왕이나 장수태왕처럼 묘사했지만, 이 태왕은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도 전쟁 만큼의 성과를 거뒀다.
역사적 맥락을 엉망으로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