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연극 <아마데우스>를 봤다.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의 작품으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와 그를 질투하는 살리에리의 이야기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영화감독 밀로시 포먼이 제작한 동명의 영화를 아는 사람들은 꽤 있을 테다.

공교롭게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소재를 사용한 다른 공연을 또 보게 되었다. 뮤지컬 <살리에르>가 8년 만에 다시 공연되며, 그 장소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를 선택한 덕분이다(또 하나 공교로운 사실은, <살리에르>가 2014년 초연될 당시에도 M씨어터를 사용했는데 옆에 있는 대극장에서 뮤지컬 <모차르트!>가 공연되었다는 것이다).

<살리에르>는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하여 천재 음악가를 질추하는 '살리에르' 역에 박규원, 백인태, 유현석을, '모차르트' 역에 정재환, 이동수, 박좌헌을, 어느 순간 나타나 이들을 바꿔놓는 비밀스러운 존재 '젤라스' 역에 백형훈, 황민수, 김준영, 유태양을 각각 캐스팅했다. <살리에르>는 9월 21일까지 공연된다.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사진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사진 ⓒ HJ컬쳐

 
질투는 곧 자기파멸

'살리에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1인자를 보며 질투를 느끼고 나아가 무력함을 느끼는 2인자의 모습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그래서인지 필자에게 살리에르는 질투에 사로잡힌 영원한 2인자라는 인상이 강하다. 이런 스테레오타입은 공연 초반 살리에르의 모습과 괴리된다.

황제에게 인정받아 궁정 악장이 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망을 받는 살리에르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런 살리에르는 명백한 1인자다. 실제로 살리에르는 베토벤, 슈베르트 등을 지도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가였다. 뮤지컬이 선망받던 음악가의 모습을 잠시나마 그려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모차르트를 만나고서도 질투라는 감정에 바로 사로잡히진 않는다. "음악은 수학"이라고 이야기하며 질서를 중시한 살리에르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모차르트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면서도, 모차르트가 가진 재능을 인정한다. 여기까진 살리에르가 좋은 선생처럼 보인다.

문제는 '젤라스'라는 의문스러운 존재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젤라스는 어느 순간 살리에르를 찾아온다. 젤라스는 살리에르로부터 질투심을 끄집어내고,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향해 보였던 일련의 애정은 단번에 시기로 변해버린다. 이때부터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질투하며 인정받지 못할까 괴로워한다. 살리에르를 변화시키는 젤라스는 질투를 의인화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음악을 추구하던 모차르트도 젤라스를 대면한 이후부터 달라진다. 이전과 같이 칭송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피폐해진다. 남 눈치 볼 것 같지 않던 모차르트도 인정투쟁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 지점에서 의인화된 질투 또는 질투의 화신으로 기능했던 젤라스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젤라스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인정을 갈구하는 심리, 욕망으로도 보인다.

살리에르와 모차르트를 모두 파멸로 이끈 젤라스는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상징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살리에르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해 쓰러지는데, 이때 젤라스가 함께 쓰러진다. 질투는 곧 자기파멸에 이른다는 걸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젤라스는 살리에르와 함께 쓰러졌지만, 홀로 다시 일어난다. 그러곤 어딘가로 떠나버린다. 그렇게 질투의 화신은 다시 어디론가 향한다.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사진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사진 ⓒ HJ컬쳐

 
질투를 다시 생각하다

뮤지컬에서 젤라스는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 도움이 필요하실 거예요." 우리는 질투를 단순히 나쁜 것으로 치부하고, 또 질투가 개인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공연을 보고 있지만, 젤라스의 이 대사는 질투에 대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게 한다.

질투는 일면 필요하다. 적절한 질투는 한 개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잠시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호튼 쿨리(Charles Horton Cooley)의 설명을 참고해볼 만하다. 쿨리는 '거울자아'라는 한 개인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한 개인에 대해 타인이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지에 따라 자아가 다르게 발전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한 개인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아를 적절히 발전시키고, 그럴 경우 긍정적 자아를 획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는 타인보다 나은 존재가 되려는 질투,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욕망이 긍정적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살리에르>에서 살리에르와 모차르트는 질투라는 감정과 대면하고 난 후부터 피폐해졌을까? 질투를 제외한 다른 감정이 질투를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뮤지컬에는 질투를 의인화한 젤라스만이 등장하여 질투를 속삭일 뿐, 질투에 대적하는 다른 존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뮤지컬을 보고 난 후 관객 스스로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질투가 한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것을 막을 다른 감정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질투와 욕망의 감정이 목적을 잃었기 때문에 피폐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경우가 이를 극명히 드러내는데, 모차르트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자 음악에 대한 고민보다는 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모차르트를 가득 채운다. 욕망은 방향을 잃었고, 여기서 젤라스는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사진

뮤지컬 <살리에르> 공연사진 ⓒ HJ컬쳐

 
덧붙이는 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li)를 우리말로 표기할 때 '살리에리'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뮤지컬 <살리에르>에서는 '살리에르'라는 표기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본 기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살리에리를 지칭할 때에는 '살리에리'라고 표기하였고, 이외 <살리에르>에 등장하는 인물을 지칭할 때에는 '살리에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공연 뮤지컬 살리에르 세종문화회관M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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