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조선인 여공의 노래> 스틸 이미지.
(주)시네마달
오사카의 한국인 직공들은 주로 10대 초반에서 20대였다. 가혹한 중노동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공장 측은 형편없는 식사를 내놓았다. 고구마죽만 줄 때도 있었다. 그나마 이런 음식도 신속히 먹지 않으면 안 됐다.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 그 시간 내에 어린 여성들이 허겁지겁 입 안에 쑤셔 넣는 모습이 오사카 공장들의 점심 시간 풍경이었다.
누구라도 일본으로 처음 건너갈 때는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께 부쳐드려야지'라고 결심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이 금전 관리를 잘 못해서가 아니다. 감염이 용이한 생활환경에 처하다 보니 예측치 못한 병원비가 나가는 일도 있었다. 공장에서 주는 음식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휴일에 바깥에 나가 음식을 사 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바깥 음식을 먹는다 해도 일반적인 음식을 먹기는 힘들었다. 식당 주인들의 차별이 노골적이었다. 한국인 손님을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조센징'으로 대하는 식당 주인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비교적 용이하게 배를 채우는 방법은 일본인들이 못 먹겠다며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육류 내장을 모아 구워 먹는 것이었다. 영화는 여성 노동자 셋이 물가에서 육류 내장을 구워 먹으며 즐거워 하는 모습을 재연 연기로 보여준다. 그 음식은 '호루몬', 오사카 사투리로 '쓰레기'였다. 훗날 일본인들도 맛을 보게 되면서 지금은 이것이 일본의 인기 음식이 됐다고 영화는 말한다.
공장 측은 고된 중노동과 형편없는 식사뿐 아니라 또 다른 방법으로도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기숙사 한 방에 여러 명을 집어넣으면서도 위생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직공들은 불결한 이불을 덥어야 했다. 그래서 전염병도 빈발했다. "제발 약 좀 뿌려달라"고 요구해도 회사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예산이 없다며 "차라리 빈대한테 나를 물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더 빠를 거야"라는 답변이 돌아오기도 했다.
전염병이 더 심해지면, 회사는 인권침해적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여성들을 널찍한 곳에 모아놓고 이들의 몸을 집단적으로 소독하는 일도 있었다. 기계 부품을 소독하듯 인간을 소독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을 그렇게 취급했으니 외출이나 휴가도 제대로 시켜줄 리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며 집에 보내달라 애원해도 거짓말 말라는 대답이 돌아올 때가 많았다. 노동자들이 혹시라도 도주할까봐 담장은 높게 세워지고 심지어 철조망도 쳐졌다.
기시와다방적의 경우에는 공장 건물과 도로 건너편 기숙사를 연결하는 지하통로가 있었다. 공장 대문을 열고 도로를 건너 기숙사로 가지 말고 지하통로로 다니라는 것이었다. 도망자를 예방하는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영화는 해석한다.
경찰력까지 투입한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