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숙학원> 스틸컷

영화 <기숙학원>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비가 내리는 캄캄한 밤,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가정집으로 들어간다. 학교에서 늦게 귀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곧 비치는 장면은 커다란 칠판과 그 앞에 놓인 책걸상. 머리를 숙이고 공부에 열중하는 또 다른 학생들이다. 이제 막 들어온 학생도 자신의 자리에 앉아 학생 무리와 같은 모양이 된다. 이 공간은 입시를 앞둔 학생들을 위해 주택을 개조해 운영 중인 기숙학원이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이곳으로 다시 모여 밤새 공부를 하고 또 잠을 잔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불법이지만, 어느 지역보다 입시 열기가 뜨거운 강남에서 이런 방식의 학원을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박용재 감독의 영화 <기숙학원>은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사회와 주변 환경의 요구에 의해 삶의 일부를 입시에 저당 잡힌 학원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 가운데 특히 더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은 이 굴레가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갈수록 더 강해지도록 만드는 자리의 사람들이다. 시스템과 내부의 학생들을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녀가 어떻게든 좋은 성적만 받길 기대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매 순간 정의와 양심을 시험당하는 사람까지. 이들 모두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입시지옥의 상징과도 같은 학원 시스템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02.
"선생님, 저 오늘 하루만 쉬면 안 돼요?"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자리에 있어도 특별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스스로 멈춰지는 것은 없다.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에도 그 자리를 잃고 싶지 않은 이들의 몸부림은 그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기도 한다. 극 중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불법학원은 자정될 생각이 없고, 그 안에 놓인 학생들에게도 현실을 제동할 수 있는 장치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영화의 개입으로 한 사람의 시간이 잠깐 멈출 수 있게 된다. 학원에 가장 늦게 도착했던 혜린(한누리 분)이다. 몸이 좋아 보이지 않던 그는 결국 쓰러지고 만다.

학생이 쓰러지는 사고가 일어남과 동시에 이들을 가르치던 선생 민영(이은조 분)의 존재감이 프레임 속으로 두터워진다. 그는 혜린이 하루만 쉬고 싶다는 부탁을 해올 때도 그녀의 엄마로부터 부탁받은 약을 건네주었다. 기면증 치료제로 학생들의 수면을 억제하는 데 쓰인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학원의 어두운 면에 대해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그 치부가 자신의 눈앞에 직접적으로 놓이고 나니 복잡해지고 만다.

중간에 놓여있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결박당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양쪽으로부터 요구되는 것 사이에서 어쩔 도리 없이 머무는 동안 상황은 더욱 나빠지곤 하는 것이다. 민영에게는 자신을 옭아매는 학원 원장과 학부모들이 있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임용 시험을 위해 불법 과외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숨기는 일과 이 일을 통해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그동안 발목을 잡아 왔다. 물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 전 쓰러진 혜린의 건강이다.

아이들의 진짜 행복과 권리
 
 영화 <기숙학원> 스틸컷

영화 <기숙학원>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학생의 안부를 걱정하는 동안 민영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동안 자신을 쥐고 흔들던 이들의 존재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거나 직접적으로 해가 되는 지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왔을, 어쩌면 자신마저 가담하게 만든 모두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가장 먼저는 혜린의 엄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한 혜린이 조금 더 쉬면 좋지 않을까 걱정하는 민영에게 딸의 문제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우리 아이의 문제라며 정확히 선을 긋는다. 공부하다 보면 이런 일은 종종 있으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는 태도다.

기숙학원의 원장 역시 학생의 걱정보다는 선생의 입을 막는 일에 더 신경을 곤두세운다. 사고를 확인하기 위한 경찰을 출석 요구를 앞두고는 조금씩 은근해지는 모습이기도 하다. 어차피 이 동네에서 우리 같은 기숙학원이 하나둘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불법인 거 다 알고 시작했을 거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그런 절차나 법이 뭐가 중요하다는 식의 태도. 현명하게 처신하라는 당부 아닌 협박까지 남긴다. 아직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보다는 이미 경계를 넘어선 이들의 마음이 훨씬 더 악독한 법이다.

영화가 이처럼 한 학생의 기절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일들의 면면을 하나씩 짚어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기숙학원이라는 변형된 형태의 미시적인 단계만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 입시라는 시기에 외롭게 매달리도록 만드는 교육 시스템 전체가 어떤 이들의 요구로 완성되어 왔는지 들여다보려는 것. 더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지 않고 관계자들의 구술에만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경찰의 모습 또한 예외는 될 수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두가 어른이라는 점과 그 많은 어른 가운데 누구도 아이들의 진짜 행복과 권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04.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땐 모른 척해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혜린을 걱정하면서도 학원 원장의 사주로 거짓 진술을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던 민영은 쌍둥이 동생 혜수(한누리 분 / 1인 2역)의 요청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 역시 엄마의 욕심으로 학원에 함께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도저히 자신이 없어 혼자 도망쳤다는. 언니인 혜린은 조금 더 쉬어야 하는데 하루라도 더 빨리 퇴원시키려는 엄마를 자신 대신 멈춰달라는 간곡한 부탁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모든 문제의 면죄부가 되고 홀로 방황하는 민영의 걸음 뒤에서 원장과 부모의 카르텔은 더욱 굳건해진다. 남자친구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 그녀의 고민을 두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여태 앓고 있었냐고 핀잔을 주며 임용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냥 눈 감고 부모의 편에 서라고 조언한다. 민영에게는 마지막 기댈 자리가 배반되는 순간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응축된 내면의 심리는 모든 상황을 역전시킬 정도의 강한 동력이 되며 극의 전환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동기가 된다. 이 작품에서는 절반만 따른다. 민영은 혜린의 엄마가 자신에게 맡긴 약통을 반납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지켜봐 달라는 충고를 건넨다. 짓눌려있던 양심을 동력 삼아 행동으로 옮기는 장면이다. 여기까지다. 감독은 그 용기 있는 행동을 긍정적인 결과로까지 이어내고자 하지 않는다. 현실이 그렇지 않아서다. 혜린의 엄마는 다른 학부모들을 부추겨 학원에 컴플레인을 넣기 시작한다. 시건방지고 오지랖이 넓은 강사는 그렇게 퇴출된다. 혜수 또한 다시 한번 기숙학원으로 끌려간다.
 
 영화 <기숙학원> 스틸컷

영화 <기숙학원>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5.
이 작품의 모든 장면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민영의 모습만큼은, 제 몸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입시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모습만큼은 허구로 여겨지지 않는다. 되려 이를 방치하는, 아니 더 몰아치는 어른들의 모습이 현실과 다르기를 바라게 될 뿐이다. 임용고시를 앞둔 민영의 모습을 생각하면 10대 아이들의 삶이 벌써 이렇게 무거울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극영화는 허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다. 이 이야기가 그렇듯 일정 부분 현실을 반영하는 부분도 있고,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일부 담아내기도 한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까지 완벽히 구조화된 현실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모든 요소가 한 번쯤 언론을 통해 문제로 제기되었던 것들이다. 어쩌면 지금도 아이들은 어딘가에서 꿈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강요 아래에 어른들의 욕심 아래에 깔려있을지 모르겠다.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 마련하는 민영의 행동은 위로나 위안보다는 바람에 가깝다. 과거의 일이라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아무렇게나 방치하거나 덮지 않을 수 있는 용기,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도 다른 누군가를 지켜낼 수 있는 정의, 그리고 어쩌면 주변의 문제를 방관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랑까지도. 우리 모두가 그런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바람 말이다.
덧붙이는 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열 번째 큐레이션인 '흐르다보면'은 7월 1일부터 7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기숙학원 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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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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