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로를 재탐색 합니다> 스틸컷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영화의 시작과 함께 택배 트럭의 적재함에 올라탄 수현(오은재 분)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잘못 배송된 택배를 당장 회수하고 자신의 원래 택배를 가져다 달라는 고객의 요구다. 그의 답답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 그녀 앞에는 오늘 안에 배달해야 할 택배조차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택배의 회수 절차 역시 정해진 규정이 있지만 목소리를 더 높이는 것은 언제나 고객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이는 것뿐이다. 수현은 택배 기사다.
그런 와중에 접촉사고가 일어난다. 길을 건너던 지영(하영주 분)이 이제 막 출발하던 수현의 트럭에 부딪혀 쓰러진다. 병원에 데려주겠다는데도 괜찮다던 그녀가 대신 트럭을 한 번만 태워달라고 부탁해 온다. 연기 오디션을 보러 급하게 가야 하는데 버스를 놓쳤단다. 수현은 그녀 자신의 상황도 무척이나 급하고 정신없지만 스스로의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에 그 말을 거절하기는 힘들다. 어쩐지 오늘 하루는 그동안 감춰두었던 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 것만 같다.
영화 <경로를 재탐색 합니다>에서는 수현과 지영 두 사람의 우연한 동행이 그려진다. 한 사람은 이제 막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고, 또 한 사람은 그와 같은 길을 걷다 현실을 책임지기 위해 잠시 이탈해 있는 상태다. 잠깐 동안의 만남이지만 이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는 잠시나마 서로를 마주한다. 그 과정은 종종 길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곤 하는 삶의 속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02.
"경로를 이탈하여,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지영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트럭의 핸들을 꺾는 순간, 내비게이션에서는 안내음이 흘러나온다. 수현의 순간이 몇 글자 되지 않는 이 짧은 문장을 듣게 되는 때가 비로소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를 위해 감독은 이미 충분한 서브텍스트를 화면 아래에 깔아 두었다. 트럭 하나에 매달려 있는 수현의 삶이 그중 하나다. 트럭의 후면에서도 진상 고객으로부터 듣는 억지 요구에 수긍하고, 전면에서 역시 중고 거래를 하기로 한 사람의 요청에도 그저 알겠다고 대답한다. 그녀의 삶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정확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중고로 팔고자 하는 연기 전공 책 속에 겨우 자신이 가장 뜨겁게 꿈꾸던 지난날의 시간이 담겨 있다.
동행의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트럭 운전사 기현(윤선근 분)이 지적하는 수현의 트럭 면면도 그녀가 어떤 삶을 보내왔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대한 많은 택배 물건을 싣고 다니는 동안 그 무게에 차체는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했고, 잠깐이면 지울 수 있는 차량의 외부 상처와 흠집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길 위에서 기름이 떨어져 시동마저 꺼지는 지경이 되어버렸을까. 그의 도움을 받은 이후에야 자신이 몰고 다니던 트럭의 모양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자신의 모습도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03.
그런 수현의 앞에 나타난 지영이 배우를 지망하는 학생이라는 설정은 아이러니하지만 꼭 필요한 만큼의 파문을 일으킨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영이 자신의 일에 대해,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이다. 자신이 과거에 배우를 꿈꿨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지 못하는 수현에게는 감춰야 할 것도, 저절로 이해되는 일도 너무 많다. 자신이 그 길을 그대로 걸어본 경험이 있어서다. 오래 감춰두었던 마음의 반영(反影)과도 같다.
계속해서 길을 잘못 들고, 기름은 떨어지고, 돌아가기에도 이미 늦어버리는 등의 두 사람의 동행을 방해하는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그때마다 몇 번이나 그녀를 두고 떠나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그러지 못한 채로 지영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일 역시 같은 맥락 위에 있다. '대사를 분명히 다 외웠다고 생각했는데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금방 긴장이 되고 만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데도 그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다.
현재의 수현에게 지영의 존재가 과거로의 회귀를 부추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비해 낮은 위치에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현실을 지지하며 다시 다가갈 수는 있겠지만 그 역시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보다는 꺼내지 못한 자신의 '경로 재탐색'에 대한 여러 복잡한 마음과 다시 마주하고 화해하는 계기에 가깝지 않을까. 처음에 그렸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지금의 내가 되었지만, 그 역시 내가 걷고 있는 길 위의 한 모습임을, 실패하거나 잘못된 일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가 그녀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 같다.
04.
"오디션 잘 봐요."
꿈으로 가득 차 푸른 생동빛이 감도는 지영의 모습과 현실에 찌들고 지친 수현의 모습이 영화 내내 한 앵글 속에서 함께 호흡한다. 수현 역시 처음부터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도 배우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고, 누구보다 치열한 날들을 그 안에서 보냈다. 지영이 잠깐 들여다본 수현의 전공책 속에서 그 시간을 잠시 엿볼 수 있다. 밝고 빛나는 날들이다.
두 사람의 모습 사이에서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 수현의 현재가 지영의 미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수현의 과거 속에도 지영의 모습에 있었다는 사실, 두 문장의 순서다. 조금은 말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두 문장이 서로 도치되지 않을 때 우리 모두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된다. 바라볼 내일도, 두고 온 내일도 어느 쪽도 반짝임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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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