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가 돌아왔다. 항상 그랬지만 이번에는 더욱 범상치 않다.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공포영화 같다는 의견도 많다. 막연한 감상인 것 같지만 사실 예리한 지적이다. 실제로 에스파는 이번 컴백에서 세 가지의 호러 장르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1. 코스믹 호러 속 에스파
 
 에스파, "Armageddon" MV 中

에스파, "Armageddon" MV 中 ⓒ SM ENT.

 
지난주 공개된 에스파의 첫 정규앨범 타이틀곡 "아마겟돈"의 뮤직비디오 중 한 장면이다. 에스파 멤버가 한 괴생물체를 마주보며 서 있다. 자욱한 안개 속에 가려져 괴물의 형체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기괴한 실루엣과 거대한 크기 때문에 섬뜩한 공포감이 느껴진다.
 
 2023 aespa 1st Concert 'SYNK : HYPER LINE' KWANGYA VLOG 中

2023 aespa 1st Concert 'SYNK : HYPER LINE' KWANGYA VLOG 中 ⓒ SM ENT

 
사실 에스파의 팬들에게 이러한 느낌의 화면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콘서트 특별 영상에서 지젤이 거대한 미지의 존재와 조우하는 장면을 이미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걸그룹의 영상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기묘한 테이스트가 돋보이는 에스파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코스믹 호러 장르의 영향이 발견된다.

코스믹 호러는 초월적이고 거대한 존재 앞에서 한없이 미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존재론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호러 장르다. '크툴루 신화'의 창시자인 H.P.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서 비롯된 이 장르에서는 대부분 물리적 규모나 위력 면에서 인간이 대적하기는커녕 그 크기를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인간이 괴물과 싸워서 격퇴해내는 일반적인 크리쳐물과는 달리 코스믹 호러의 인간 묘사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력한 미지의 존재 앞에서 인간은 그것이 품은 감정이 선의인지 악의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으며, 압도적인 무력감에 짓눌려 덧없이 스러져갈 뿐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中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中 ⓒ Netflix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中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中 ⓒ Netflix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삼체> 역시 코스믹 호러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외계 문명 '삼체' 함대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지구인들은 그저 한낱 개미처럼 몰살당할 뿐이며,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는 허무감과 무력감에 빠진다. 삼체인들이 지구인들에게 보내는 "너희는 벌레다(You are bugs)"라는 메세지는 작품뿐만 아니라 코스믹 호러 장르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라 할 수 있겠다.
 
 에스파, "Armageddon" MV 中

에스파, "Armageddon" MV 中 ⓒ SM ENT


너무나도 거대한 나머지 눈동자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마주하고 어둠 속에서 얼어붙는 에스파 멤버들의 모습이다. 에스파가 선보인 코스믹 호러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면 조던 필 감독의 영화 <놉>, 스티븐 킹 원작 영화 <미스트>도 시청해 보자.

2. 파운드 푸티지 속 에스파
 
 aespa 에스파 'Armageddon' Find The Authentic 中

aespa 에스파 'Armageddon' Find The Authentic 中 ⓒ SM ENT

 
에스파의 정규 앨범 티저 영상은 서늘한 색감의 CCTV 화면을 말없이 송출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인 화면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aespa 에스파 'Armageddon' Find The Authentic 中

aespa 에스파 'Armageddon' Find The Authentic 中 ⓒ SM ENT

 
이윽고 어두운 CCTV 화면에 'person 99%'라는 메세지가 하나둘 출력되면서 안면인식 AI가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마치 저 수많은 사람들 중 인간이 아닌 존재가 섞여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조성된다. 에스파의 이 섬뜩한 티저는 공포영화의 한 장르인 '파운드 푸티지'의 문법을 차용해 제작되었다.

파운드 푸티지는 화면이 CCTV, 캠코더, 핸드폰 등을 통해 녹화된 실제 영상인 것처럼 연출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호러 장르다. 이 장르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계기는 1999년 저예산 공포영화 <블레어 위치>의 메가히트였다.

<블레어 위치>의 제작진은 이 영화가 실제로 저주받은 숲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남긴 캠코더 영상을 입수해 그대로 담은 것이라고 홍보했고, 생생한 1인칭의 영상 때문에 그 마케팅을 철석같이 믿은 수많은 관객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파운드 푸티지 장르는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실제 상황을 녹화한 영상인 것처럼 관객을 속임으로써 몰입감과 공포감을 극대화시킨다. 전세계적 흥행을 기록한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의 경우 가정집 내부를 녹화한 CCTV 화면을 통해 악마의 움직이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압도적인 긴장감을 선사하는 연출로 유명하다.
 
 에스파, "Armageddon" MV 中

에스파, "Armageddon" MV 中 ⓒ SM ENT

 
캠코더 영상이라는 소재는 이미 뉴진스가 "Ditto"에서 선보인 바 있지만, 에스파는 그것을 파운드 푸티지 호러의 질감으로 적절히 변주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에스파가 보여준 파운드 푸티지 장르 특유의 섬뜩함이 마음에 들었다면, 한국 공포영화 역대 흥행 순위 2위를 기록한 <곤지암>으로 파운드 푸티지에 입문해 보자.

3. SF 호러 속 에스파
 
 에스파 홈페이지

에스파 홈페이지 ⓒ SM ENT

 
음모론을 설파하는 B급 인터넷 광고처럼 보이지만, 에스파의 홈페이지(aespa.com)에 올라온 이번 앨범의 공식 홍보물이다. 우주에서 지구로 날아오는 미확인 물체, 하늘에 떠오른 이상현상, 인간을 닮은 형상을 한 괴생물체 등 외계인 괴담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다.
 
 에스파 홈페이지

에스파 홈페이지 ⓒ SM ENT

 
이에 더불어 외계 생명체의 출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경고 메세지를 통해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러한 장면들에는 SF 호러의 테이스트가 진하게 배어 있다.

SF 호러는 공상과학의 상상력과 공포의 서스펜스를 결합한 장르다. 앞서 설명한 두 장르와 달리 SF 호러가 다루는 주제의 범위는 넓은 편인데,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뿐만 아니라 AI의 폭주, 유전자 조작, 위험한 실험 등 고도로 발전한 과학기술로 인한 상황 역시 SF 호러에 속한다.

가장 유명한 SF 호러 영화는 역시 <에일리언> 프랜차이즈라 할 수 있다. 흉측하고 난폭한 외계 생물 에일리언과의 사투를 그린 이 시리즈는 외계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현대인의 두려움을 정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스파 홈페이지 및 "Licorice", "Long Chat" MV 中

에스파 홈페이지 및 "Licorice", "Long Chat" MV 中 ⓒ SM ENT


에스파는 이러한 SF 호러 장르의 클리셰들을 적절히 차용하면서도, 무드가 너무 호러로 치우치지 않도록 키치한 8비트 그래픽으로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기상천외한 민트초코 외계인을 등장시키는 등 유머러스한 코드로 케이팝과 호러를 영리하게 절충해 보인다.

4. 결론
 
 에스파, "Supernova" 컨셉 포토

에스파, "Supernova" 컨셉 포토 ⓒ SM ENT

 
최근 여러 그룹 사이에서 불거지고 있는 유사성 논란은 근본적으로 케이팝 아이돌이 소화할 수 있는 콘셉트의 영역이 너무 협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케이팝 산업이 더 많은 대중을 포섭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숙제이다.

이런 상황에 꾸준히 음악과 콘셉트 면에서 새롭고 도전적인 시도를 해오며 아이돌의 표현 영역을 넓히는 에스파의 행보는 매우 모범적이라 할 수 있다. 에스파와 4세대 아이돌들이 계속해서 만들어나갈 새 시대의 케이팝이 얼마나 다채로워질지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케이팝 음악 아이돌 에스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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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정빈입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문화비평학을 전공했고, 지난해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여성동아, IDOLE 등 다양한 웹진과 잡지에 대중음악 칼럼을 기고해 왔습니다. (문의: bin548354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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