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공연사진
엠피앤컴퍼니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얼마나 유효할까?
'normal'의 두 번째 의미는 '(정신 상태가) 정상인'이다. 정상이 있다면 정상이 아닌 것, 쉽게 생각해 '비정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쉽게 사용하고, 또 편의에 따라 구분하며 살아간다. <넥스트 투 노멀>의 기본 설정 역시 세상의 쉬운 구분을 따른다. 다이애나는 정신적으로 비정상이다. 비정상이라고 분류되었기 때문에 정상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정해진 치료법을 따른다. 물론 그 치료가 다 들어맞는 건 아니다. 상태가 악화되거나 호전되지 않아 의사를 바꿔 다른 치료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시간을 거듭하다 보면 그 구분을 강하게 문제시하는 장면이 하나둘씩 등장한다. 먼저 게이브의 죽음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갓 태어난 게이브는 심하게 아팠는데, 병원에서는 검사 결과 모두 '정상'이라고 진단했다. 그렇게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게이브는 끝내 장폐색으로 세상을 떠난다.
다이애나가 치료 매뉴얼에 불만을 내뱉는 장면도 상징적이다. 아들을 잃은 다이애나에게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매뉴얼을 설명한다. 4개월 이상 슬픔이 지속되면 병적 징후이므로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고. 여기에 다이애나는 아들이 죽었는데 고작 4개월이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며 절규한다. 이런 장면들이 거듭되면 거듭되수록 관객은 정상, normal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주장을 살펴볼 만하다.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 정신의학의 문제에 특히 천착했다. 그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허상이며, 각각에게는 고유한 개별성과 특수성만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신의학 지식, 권력이 편의적으로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해온 것이다. 19세기 들어 의학 지식이 지배적 영향력을 획득하며 불완전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류했고(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이전에도 튀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를 정신병자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 분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푸코는 조금 더 나아가 권력에 의한 분류가 타자에 대한 배제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생각해보라.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지금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지, 소수자를 향해 우리는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그렇다면 이쯤에서 <넥스트 투 노멀>과 결부해 고민해봐야 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얼마나 유효한지 말이다. 다이애나의 마지막 행동은 그런 우리의 고민에 더 박차를 가하게 한다. 다이애나는 의사가 제시한 치료를 거부하고 떠난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회복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끝으로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next to normal'은 무엇일까? 비전형적인 것일까? 비정상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범함 다음에 특이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정상 다음에 비정상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next to normal'은 이상한 것이 아닌, 평범한 그 언저리의 무언가다.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범함 그 언저리에서, next to normal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