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페인, 벨기에, 덴마크,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말레이시아, 일본, 부탄, 카타르, 요르단 등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군주제. 이들 국가는 모두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전세계 208개 국가 중 유럽 12개국, 아시아 11개국, 아프리카 3개국, 아메리카 9개국, 오세아니아 6개국 등 총 41개 국가가 여전히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이 퍽이나 놀랍다. 여기서 순수한 궁금증이 인다. 군주제는 왜, 어째서 현대에까지도 여전히 종속, 유지되는가? 로열패밀리라 불리는 왕실은 정말로 필요한 조직인가?

이런 궁금증 때문에 보게 된 드라마가 바로 넷플릭스 드라마 <크라운>이다. <크라운>은 엘리자베스 여왕 2세의 결혼부터 현재까지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한 전기 드라마로 총 시즌5까지 계획되어 있고 현재 시즌4까지 공개되었다. 여왕 자신을 포함한 왕실의 공적이고도 사적인 이야기, 그리고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여러 인물과 국가들의 정치적인 에피소드들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드라마는 분명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끌어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그런 사실의 나열이 진실로 이어지는지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추악한 이면, 권력다툼으로 이어지는 의회의 무능함, 마거릿 공주와 아버지 수행비서와의 불륜, 필립공의 외도를 넌지시 암시하는 일탈 등 드라마가 보여주는 내용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기정사실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역사적인 사실들 사이에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인간적 고뇌와 노력, 성찰 등을 배치하는데 이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실은 별로 중요치 않기도 하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현대의 신화>에서 고대에만 신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여전히 신화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현대의 신화란 '현실이란 완벽히 역사적인 것임에도 저널리즘 등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 본래적인 것으로 둔갑해 버리는 현상'이며 '자명한 것으로 포장된 진술 속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는 이데올로기적 오용'으로써 신화가 가지는 내용이나 개념, 관념이기 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그 자체이면서 그 메시지가 발현하는 숨은 힘이다. 신화는 자신의 메시지를 통해 교묘하게 자신의 '역사를 자연으로 대체함으로써 현실을 중립적이며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의 신화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또 그 의도를 성공하는 곳은 바로 미디어다. 

드라마 <크라운>은 제작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여왕과 왕실의 존재 이유에 대한 당위를 부여하는 도구로써도 충분히 기능하고 있다. 왕실의 존재가 결코 현대 사회와 이질적이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만의 높은 세계(상류층)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는 존재이면서 그와 동시에 공적인 삶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다는 메시지만으로도 이들에 대한 신화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니까 왕실의 존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라는 무의식적인 세뇌가 곧 신화로써 작용하는 지점이다). 엘리자베스 2세 사후에 드라마가 만들어졌더라면 이러한 의심의 눈초리를 조금 더 피할 수 있었을까?

군주제는 왜, 현대에까지도 여전히 유지되는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왕좌에 오른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희생해가며 왕관의 무게를 견뎌 내야 했고 대중 앞에서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대영제국의 영광은 완전히 사라졌고, 영국 왕실의 권위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 전쟁의 여파로 영국 경제는 휘청거렸고, 배고픈 사람들은 왕실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시점에 엘리자베스가 느낀 압박과 두려움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을 것이다. 드라마는 실제로 이런 부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감당해야 했던 왕관의 무게가 '나의 백성들(my people)'을 위한 숭고한 희생에서 비롯된 것인지, 탐욕스러운 의회에게 휘둘리지 않고 존엄성을 가진 왕실로서 유지, 존속 시켜야 한다는 왕실 가장의 책임감인지는 드라마를 보면 분명해진다. 그렇기에 영국 왕실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자화상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설득적이지도 않는 것이 사실이다.

에드워드 8세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조지 6세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그가 왕위를 포기한 바람에 왕위를 물려받게 된 조지 6세가 스트레스로 빨리 죽은 것이라고 암시하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자신은 왕위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의무를 다한다는 왕실의 주장에서 지금은 고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왕권신수설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드라마는 왕실의 이런 착각을 폭로하는 것일까? 드라마의 관점은 시종일관 애매하다. 
 
크라운 공식 포스터 시즌 1과 2는 비교적 젊은 여왕의 시절을 그려냈다
크라운 공식 포스터시즌 1과 2는 비교적 젊은 여왕의 시절을 그려냈다넷플릭스
 
'여성의 연설은 목에 걸린 가시와 같고 말투는 고상한 체 하는 여학생과 같다.'
(시즌 2, 5화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운>은 시즌 2의 다섯번째 에피소드 '마리오네트' 단 한 편만으로 드라마로서의 가치가 충분했음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2세는 재규어 공장에서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다. 늘 그랬듯 여왕의 수석보좌관이 연설문 초안을 작성하고 그를 본 젊은 부보좌관은 시대에 역행하는 연설이라며 수정을 요청하지만 함께 있던 고문 보좌관이 '영국 국민은 군주를 흠모하고, 그것이 영국인의 자격을 구성하고 정의하는 것일세'라며 의견을 묵살한다. 게다가 이런 말도 덧붙인다. '무신경함이 반란으로 발달하기는 힘들다네.'

여왕은 수석보좌관의 연설문을 들고 공장 노동자들 앞에서 결국 연설을 하게 된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여러분의 성실함과 따분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참고 견뎌내는 능력에 우리 사회 전체의 행복과 번영이 크게 좌우됩니다."

이 연설을 들은 영국의 귀족이자 저널리스트인 올트링엄은 여왕에 대해, 그리고 군주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가면) 군주제는 번영은 커녕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논조의 비판을 자신의 매체에 싣게 된다. 이 글은 이후 엄청난 파장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 일로 '국민 밉상'이 된 올트링엄은 결국 TV쇼에 출연해 전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해야 했다. 

"군주제를 비평하고 폐하의 인신을 공격하는 건 제게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건 세계 2차 대전과 수에즈 위기 이후 영국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영국의 군주제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전쟁 전 일과를 반복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여왕과 그 신하들이 가진 관점은 군주제가 지배하고 공화제가 예외라는 거였지만 오늘날에는 공화제가 지배하고 군주제가 예외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왕실에 대한 비판이 헌정의 위기를 초래할 만큼의 사안으로 확대되지만 올트링엄은 왕실이 미처 보지 못한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역할을 용감하게 수행한다. 드라마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군주제가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도 생존해 갈 수 있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언론은 타성에 젖은 여왕에게 경고한다. 그리고 여왕은 그 경고를 겸허하게 수용한다. 

드라마를 모두 본 이후에도 여전히 21세기의 현대사회에서 왕실의 존재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올트링엄의 주장대로 왕실이 국민을 통합하는 상징적인 원수로서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권력은 없지만 신분제가 주는 권위와 고결함(novelty)을 이들 왕실이 지금도 소유하고 유지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러나 그런 유지 이면의 계약서에 적힌 국민과의 소통, 국민을 위한 존재라는 계약 조건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한 군주제는 향후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언론과 미디어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대중들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신화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그런 신화들 모두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대중의 갈망 또한 신화를 통해 공고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본래적으로 신화를 만들어내는 기능이 존재하기 때문에 더더욱 불순한 의도로 정보를 생산하는 것을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이를 지켜나가는 것은 언론과 미디어에 주어진 의무이자 스스로 주장할 권리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기사의 내용은 본인의 브런치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크라운 넷플릭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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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 여행을 좋아하고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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