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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만든 김도산 |
10월 27일은 영화의 날이다. 1963년 제정되어 작년까지 44회의 기념식을 치렀다. 최초의 한국영화로 인정받고 있는 <의리적 구토>의 극장 상영일인 1919년 10월 27일을 기준 삼아 제정된 것이다. 영화의 날 제정에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다. 자유당 말기인 1959년, 임화수가 이끌던 반공예술인단과 한국영화제작자협회에서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국산영화의 앞날을 축복하고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 하고자 10월 21일을 '국산영화의 날'로 제정하여 1회 기념식을 열었다. 그러나 다음해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정권에 봉사하던 반공예술인단이 해산되면서 영화의 날도 유명무실해졌다. 1961년에는 5·16 쿠테타 직후 정권을 잡은 군부에 의해 기존의 문화단체가 모두 강제 해산되었다.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련)도 이때 해산되어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로 재조직 되었다. 영화인조직 또한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직을 해산하고 새롭게 재조직하게 되여 문총련 산하 한국영화인연합회는 1962년 예총 산하 한국영화인협회로 재탄생하였다. 원로 영화인인 윤봉춘을 이사장으로 복혜숙, 김소동을 부이사장으로 선출하여 출범한 한국영화인협회에서는 영화인 스스로 한국영화의 뿌리를 찾아 이를 기념하고자 한국영화의 시원을 찾아 이를 기념하는 '영화의 날'을 제정하기로 하고 영화의 날 제정 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추진위원회는 최초의 한국영화를 <의리적 구토>로 정하고 단성사에서 상영된 날을 기준삼아 10월 20일을 영화의 날로 정해 1963년부터 이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영화인들 사이에 10월 20일이 아니라 27일이 <의리적 구토>의 공식 상영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1966년 한국영화인협회는 논란을 해결하고자 이 문제의 고증을 공보부에 의뢰했다. 영화의 날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 공보부에서는 1966년 4월 8일 공보부 장관 홍종철 명의로 고증서를 보내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단성사 개봉일은 10월 20일이 아니라 10월 27일이며 이날 한국최초의 기록영화인 <경성전시의 경> 또한 함께 상영되어 영화 창생의 날로서 의의를 깊게 한다"고 확인해주었다. 비로소 최초의 한국영화 상영일이 정확히 밝혀진 것이었다. 한국영화인협회에서는 1966년부터 영화의 날을 10월 27일로 바꾸었다.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를 만든 김도산은 조선 최초의 영화인이었다. 영화의 발명자가 아니기에 한국의 뤼미에르, 한국의 에디슨은 될 수 없었지만 영화를 최초로 제작한 인물이기에 그 공로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김도산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극계 진출 이전의 생애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극계에서는 임성구의 그늘에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살면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면 모를까 최초의 연쇄극인 <의리적 구토>를 만든 지 불과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기에 그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김도산에 관한 작은 기록들을 수습하여 그가 어떻게 최초의 한국영화를 만들게 되었는지 추적해보겠다. 이를 통해 한국영화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김도산은 1891년 서울 충무로 초동 출생으로 상동학교를 졸업하고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헌병 옷을 벗어 던지고 처음 극계에 발을 내디딘 것은 1911년경 임성구가 이끄는 혁신단에 입단하면서이다. 임성구는 1887년생으로 김도산보다는 4살이 많았고 이 땅에 최초로 연극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근대적 교육도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임성구의 극계 투신은 흥미롭다. 종현성당 뒷문 근처에서 백형 임인구와 함께 과일장사를 하던 임성구는 저녁에는 일본인 극장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공연을 훔쳐보았다. 임성구가 하는 일은 관객들의 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인 극장은 다다미 좌석으로 문 입구에는 신을 보관하는 하족실이 있어 관객들은 입장시 신을 벗어야 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인 극장에는 일본인 거류민들의 위안과 전승기념을 축하하는 일본 내지의 신파극단 청년파의 공연이 있었다. 임성구는 하족실을 드나들며 처음 보는 신파극에 매료되어 자신도 신파극을 하여 자신이 그랬던 것과 같이 조선인 관객들을 감동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몇 년간 동지들을 규합하고 자금을 모아 신파극단 혁신단을 창단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와 최초의 연극을 공연했던 이인직에 이은 두 번째 시도였다. 1911년 초겨울, 남대문 밖 어성좌에는 혁신단의 창단공연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연극, 영화의 개척자 중 한명인 안종화는 자신이 쓴 <신극사이야기>에서 혁신단의 첫 공연에 대해 "판소리와 창을 주로 하는 협률사 공연으로 잘못알고 입장한 50여명의 관객이 있었을 뿐이며 이 중, 공연이 끝날 때까지 남은 관객은 불과 5~6명뿐이었고 임성구는 다음날 공연을 취소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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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구의 혁신단은 흥행수입으로 각종 자선행사를 벌였다. 사진은 1911년의 걸인잔치 기념사진. |
임성구 일행은 첫 공연의 실패를 거울삼아 겨울 내내 열심히 노력하였다. 봄이 오자 연기와 무대의 수준은 한층 높아졌다. 2회 공연은 1912년 4월 조선인 극장인 연흥사에서 공연되었다. <육혈포강도> 등을 비롯하여 일본 신파극의 유명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렸다. 3일 간격으로 바뀌는 레퍼토리에 능숙해진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혁신단의 공연은 차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혁신단을 이끌며 작품마다 주인공을 도맡았던 임성구는 당대 신파극을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 잡았다. 당시 임성구의 인기는 사이클 선수로 각종 대회에서 일본인들을 물리쳐 자전거왕의 자리에 등극했던 엄복동과 비견되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자전거는 엄복동, 신파극은 임성구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혁신단이 인기를 끌자 이곳저곳에서 신파극단이 생겨났다. 임성구는 새로 생겨나는 신파극단에 대항하고자 '신파원조 혁신단'이란 깃발을 만들어 자신이 신파극의 원조라 선전했다. 임성구의 전성기에 극계에 등장한 김도산은 임성구라는 대스타의 빛에 가린 조연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혁신단의 창단멤버들이 임성구와는 친형제처럼 가까운 친구들이었기에 뒤늦게 혁신단에 가담한 김도산과 김현(김소랑)은 아무래도 기존의 멤버들과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혁신단에서 수십 편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매일매일 작품을 바꿔가며 공연하는 동안 김도산이 맡는 역은 주로 악인이나 주인공의 친구 정도였다. 1933년 삼천리에 실린 글을 보면 김도산은 <장한몽>에서 이수일의 친구인 의협남아 백낙관역에 능숙했다고 한다. 유일단을 이끌던 이기세가 1916년 윤백남과 힘을 모아 예성좌를 만들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기세는 극계를 떠났다. 1917년 김도산은 임성구와 결별하고 자신의 극단인 개량단을 만들어 독립하였다. 김도산이 개량단을 조직하자 해산된 예성좌에서 나온 유일단 출신 단원들이 김도산의 개량단에 가입하였다. 개량단은 서울의 단성사와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울공연보다 지방순회공연 횟수가 많아졌다. 서울에서는 신파극이 전성기를 보내고 사그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관객은 신파극이 아닌 서양의 활동사진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