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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제작, 윤백남 연출의 <운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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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윤백남은 민중극단의 운영을 배우 안광익에게 맡기고 자신은 김해의 합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위치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때 부산에서는 최초의 영화사가 만들어졌다. 부산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자본을 투자하여 만든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1회 작품으로 <해의 비곡>을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
<해의 비곡>의 연출은 출자자로 회사 중역이기도 했던 일본인 왕필렬이 맡았다. 주연은 안종화, 이채전, 이월화 등 극예술연구회 출신들이었다. 첫 번째 작품이 성공하자 영화사에서는 조선인 대상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전속의 조선인 감독, 시나리오작가를 두기로 결정했다. 그 물망에 오른 이가 영화감독 경험이 있던 윤백남이었다.
@BRI@백남과 안면이 있던 안종화가 백남의 영입 교섭을 맡았다. 백남은 신문화의 개척자답게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전속 감독 겸 시나리오작가로 선뜻 입사하였다. 일본인 자본주들은 일본어로 풀어내는 백남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면서 그의 입사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백남은 조선 세종시대를 배경으로 안평대군과 궁녀 운영, 출중한 능력을 가진 김진사의 삼각연애를 소재로 한 궁중야화 <운영전>을 자신의 입사 첫 작품으로 선택했다.
<운영전>의 제작은 평탄하지 않았고 결과도 좋지 않았다. 백남은 <해의 비곡>으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히로인이 된 이채전, 이월화를 빼고 신인 김우연을 발굴하여 주인공 운영 역을 맡겼다.
촬영 도중 백남과 김우연의 스캔들 기사가 매일신보에 대서특필 되었고 배우와 스태프는 백남의 능력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다. 대사도 한 마디 없는 가마꾼 역의 나운규가 촬영도중 "저따위 감독은 죽여 버리는 게 낫지"라며 욕지거리를 했을 정도였다.
<운영전>은 부산과 서울에서 개봉됐으나 2000원의 적자가 났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백남의 위치는 위태로웠다. 백남은 <해의 비곡>에서 조감독을 했던 이경손을 설득하여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던 연구생 나운규, 주인규, 이규설, 김태진 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자신의 영화사를 세운다. 윤백남이 세운 백남프로덕션은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영화사였다.
제작자로서 백남의 출발은 고난이었다. 백남프로덕션이라는 간판은 세웠으나 영화를 제작할 돈이 없었다. 해를 넘긴 1925년, 함흥 출신 연구생 주인규와 저축장려 계몽영화의 제작을 의뢰한 바 있는 백남의 일본인 친구인 모리가 자금을 대어 백남프로덕션의 1회 작품 <심청전>의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백남은 영화감독으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서였는지 제작만 맡았다. 연출과 각색은 이경손이 담당했으며 심봉사 역을 나운규가 맡아 배우로서 재능을 보여주었다.
<심청전>은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흥행이 신통치 못해서였는지 백남은 <심청전>의 필름을 들고 일본 흥행을 떠난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백남은 이광수의 신문연재소설 <개척자>를 무료로 영화화하기로 양해를 얻었다. 백남프로덕션의 2회작 <개척자>는 이경손 연출로 촬영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떠난 백남은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고 영화촬영을 위해 얻은 빚으로 채무자들이 영화사로 쳐들어오는 상황이 매일 일어났다. 남은 직원들은 <개척자>의 흥행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 했지만 영화 개봉일을 전후하여 내리기 시작한 유례없는 폭우로 흥행은 참패하였다. 남은 직원들은 영화사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일본서 돌아온 백남은 거액의 빚만 떠안게 되었다.
영화감독으로서 마지막은 창간시부터 인연을 맺은 동아일보에서 1930년 제작한 <정의는 이긴다>라는 영화였다. 이후, 자신이 주도하여 극단을 조직하거나 영화사를 운영하지 않았지만 영화, 연극의 끈을 버리지도 않았다. 연극, 영화의 원로로서 후배들이 조직한 연극, 영화 단체에 기꺼이 이름을 빌려주었다. 특히 1929년 이기세, 안종화 등과 문예영화협회를 만들어 후진양성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후 백남은 문필가로 야담가로 정신없이 바쁜 세월을 보낸다. 백남의 신문 연재소설은 동아일보 창간 직후 연재한 <수호지>가 처음이었다. 이후 연극, 영화 활동으로 소설연재를 하지 않았다가 1930년부터 연재를 재개했다. 동아일보에서만 1930년 <대도전>, 1931년 <해조곡>, 1933년 <봉화>, 1934년 <흑두건>, 1935년 <미수>, 1936년 <백련유전기> 등을 연재했고 조선중앙일보에서 1933년 <항우>, 매일신보에서 1937년 <사변전후> 등을 연재했다.
문필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도중에 야담가로서 전국을 돌며 청중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야담 구연은 레코드로 녹음되어 팔리기도 했는데 언론인 유광렬의 말을 빌린다면 "방정환은 동화구연으로 윤백남은 야담구연으로 이 나라에서 그 위를 덮을 사람이 없는 쌍벽이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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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10월, 경성방송국의 조선인 방송인들.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조선어방송과장 윤백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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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창설된 조선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1932년 조선어 방송채널을 만들기 위해 담당 책임자로 윤백남을 초빙하였다. 방송인으로의 이력이 더하여졌다. 백남은 조선어 방송 시간에 자신의 야담구연을 편성하고 직접 마이크 앞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1년 정도 방송국 간부로 일하며 조선어 방송 개국을 지휘한 후 그는 "가요나 기타 연출관계로 항상 방송할 기생 교섭이나 기타의 일에 매달리게 되어 안되겠다"는 이유로 퇴사한다. 동아일보의 편집고문이며 문필가, 야담가로 정신없이 바쁜 상황에서 조선어 방송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자신의 임무는 완수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백남은 1934년 잡지 <월간 야담>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1년간 활동했다. 그러나 1936년 만주로 이주하는데 그가 발행한 <조선야담전집>으로 많은 빚을 지게 되자 도망치듯 만주로 떠나갔다고 한다. 만주에서 역사소설을 쓰며 재만조선농민문화향상협회의 상무이사로 재직했으며 독립투사와 교섭했다는 이유로 2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 후, 백남은 최초의 영화인 조직인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위원장으로 위촉된다. 일제말기 어용영화를 만들던 조선영화사의 조선인 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인 조선영화건설본부는 좌익계열이 주도하였다. 백남은 좌익 영화인들이 주도하던 조선영화건설본부를 탈퇴하였으며 우익문인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에 이름을 올렸다.
백남은 교육자로서 말년을 보냈다. 1946년 국민대학교 이사 겸 교수로 있었으며 전쟁기간 해군에 입대하여 전쟁사 편찬에 간여했다. 전쟁 직후인,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으로 재직했고 1954년에는 초대 예술원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29일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윤백남은 평생 개척자로 살았다. 신문, 연극, 영화, 소설, 야담, 방송에 이르기까지 최초라는 타이틀에는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일본 유학 출신의 지식인으로 유복하고 유력한 생활을 쫓았다면 충분히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백남은 이 땅에 신문화를 보급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신개지를 개척하고 또 개척했다. 문화로서 민중을 계몽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척자로 살았기에 개인적으로는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헌신은 이 땅에 신문화가 꽃피우게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그러기에 윤백남에게 한국 신문화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결코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