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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극장 시절 배우 차홍녀와 그녀를 최고의 배우로 만든 연출가 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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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2월, 철원극장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북선 순회공연을 마친 극단 아랑의 단원들은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철원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원들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옷깃을 여몄다. 공연직후 무대 뒤에서 쓰러졌을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던 여배우 차홍녀는 거적을 쓰고 웅크리고 있는 거지를 발견하고 1원을 적선했다. 기차에 올랐다. 열이 나기 시작한 차홍녀는 서울에 도착 할 때쯤 헛소리까지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온몸에 발진이 돋아 꼭 괴물처럼 보였다. 마마라고 불리던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북선 순회공연으로 지친 상태에서 병에 걸린 거지와의 접촉으로 불치의 병이 옮아 온 것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연출가 박진은 차홍녀의 집에 찾아가 천연두에 걸린 그녀를 안고 통곡했다. 박진은 차홍녀의 때 묻지 않은 모습과 착한 마음씨가 마음에 들어 지방극단을 전전하던 그녀를 동양극장으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스타로 키워낸 연출가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차홍녀를 바라보는 박진은 제 자식이 죽은 것마냥 원통한 심정이었다. 며칠 뒤 차홍녀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착한 마음씨로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되었지만 그 착한 마음으로 인해 세상을 너무 일찍 떠나간 것이었다. 홍제동 화장터로 가는 운구행렬 끝자락에는 그녀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한 거지들이 뒤를 따라가며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짧은 생을 살았지만 무대 위에서 최고의 스타였던 차홍녀. 생전 그녀가 누렸던 인기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차홍녀를 최고의 배우로 키운 연출가 박진과 연극배우 고설봉만이 그들의 회고록에서 그녀를 추억하고 있을 뿐이다.
22세, 꽃다운 나이에 세상 떠난 차홍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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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 근처에 있었던 동양극장. 이곳에서는 1년내내 연극 공연이 끊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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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홍녀는 1918년 경기도 연천의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언니는 연화라는 이름의 기생이었다. 의정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친지의 권유로 극단에 들어갔지만 여배우로서 빼어난 미모가 아니었기에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희락좌, 신무대, 황금좌 등의 극단을 전전하다 동양극장의 연출가 박진의 눈에 들어 1935년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의 창단 단원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박진은 차홍녀의 첫 인상을 "흙 묻은 김장 무 같아서 두들겨 만들기 쉽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청춘좌에는 기라성 같은 여배우들이 있었다. 스크린과 무대에서 최고의 여배우로 추앙받던 김소영, 연기 하나는 최고라는 평가를 듣던 김선영, 그 외에도 당대 최고의 여배우라고 손꼽히던 고참 여배우 김선초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방극단 출신에 경험도 미천한 차홍녀는 자연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차홍녀는 일본명작주간에 상연된 <영아살해>에서 처음으로 주역을 맡았다. <영아살해>는 날품팔이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먹지 못해 젖도 안 나오고, 먹으려면 일을 하러나가야 되는데 젖먹이 아이 때문에 일하러 나가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끝내 아기를 살해하고 순사에게 울며불며 이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내용의 단막극이었다. 차홍녀의 주역으로 첫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공연 내내 무대 위에서 차홍녀의 연기를 지도했던 박진은 차홍녀에게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격려했다. 차홍녀는 박진의 지도로 짧은 기간에 청춘좌의 중심 배우로 성장한다. 특히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만 맡는다는 <춘향전>의 춘향 역을 맡으면서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1936년 1월에 상연된 이 작품에서 이도령 역은 황철, 방자 역은 심영이 맡았다. <춘향전>은 이도령 역을 맡은 황철이 실제 나귀를 타고 입장하자 관중은 큰 박수를 쳤고 박수 소리에 놀란 나귀가 관중석으로 뛰어 들어간 소동을 일화로 남기고 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스타가 되다 <춘향전>에서의 차홍녀의 인기는 전주곡에 불과했다.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상연되었기 때문이다. @BRI@당시 극장에는 냉방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여름이 비수기일 수밖에 없었다. 1936년 7월, 동양극장의 간부들은 여름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방법을 고심한 끝에 사극을 내어 놓기로 했다. 첫 번째 작품으로 월탄 박종화가 쓴 <황진이>를 각색한 <명기 황진이>를 무대에 올렸다. 비수기임에도 공연이 열린 7일 동안 많은 관객이 들어찼다. 다음 작품으로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를 각색한 작품이 공연됐다. 이 작품을 보려고 지방의 유생들까지 단체로 몰려와 극장 바닥은 땀으로 흥건할 정도로 초만원을 이뤘다. 그러나 이왕직에서 공연중지를 요구해 부득이 8일 만에 공연을 끝내야 했다. 다음에 올릴 작품이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정보다 일찍 막을 내린 것이다. 지배인 홍순언은 무명의 극작가 임선규가 동양극장에 입사할 때 제출한 극본을 끄집어냈다. 박진과 최독견이 임선규의 극본은 지독한 신파라며 반대했음에도 대안이 없었다. 공연을 올리기로 했다. 최독견은 기생 얘기가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것 아니겠느냐며 제목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고 고쳤고 바뀐 제목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임선규는 동양극장의 대표 배우 황철과 차홍녀를 염두에 두어 두고 이 작품을 썼다. 그래서 주인공 이름도 철수, 홍도로 지은 것이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오빠 철수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주인공 홍도가 오빠의 친구 광호를 만나 결혼을 했으나 시집의 무시와 괄시를 받고 종국에는 남편에게도 버림받게 되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남편의 새로운 약혼녀를 칼로 살해, 순사가 된 오빠의 손에 잡혀간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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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신문광고 |
황철과 차홍녀가 연기한 이 신파극은 당시 경험해 보지 못한 대단한 흥행을 하였다.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공연을 보러 동양극장 앞으로 몰려왔으며 서대문 경찰서에서 동원된 경관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관객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특히, 공연기간 내내 서울 시내의 기생들이 떼로 몰려왔는데 홍도와 자신을 동일시 한 기생들의 눈물로 극장은 연일 울음바다가 됐다. 장안의 기생들을 구경하려 극장을 찾은 한량들도 많았다. 서울에서만 수십 번의 재공연이 있었지만 만원관객이 아닌 적이 없었고 지방공연도 연일 대 성공이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양극장의 마르지 않는 돈줄이었다. 무명의 극작가 임선규는 일약 스타 작가가 되었으며 황철, 차홍녀의 인기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더욱이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라는 이서구의 노랫말은 전국방방곡곡 울려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