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믿었던 나도 어느새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생활의 유혹을 느끼던 무렵이었다.'

1992년 봄, 출소 후 갈 곳이 없던 비전향장기수 조창손, 김석형 두 할아버지를 자신이 살고 있던 봉천동으로 데려오기 위해 자동차 운전대를 잡은 감독의 독백으로 영화 <송환>(2003)은 시작된다.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라는 낯설음과 호기심으로 시작된 이들의 만남은 그후 12년 동안 계속됐다.

▲ <송환>의 김동원 감독
ⓒ 박영신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선댄스 영화제에 진출해 '표현의 자유상'을 거머쥔 영화 <송환>을 국내외 영화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김동원(푸른영상 대표) 감독을 '해운대' 스펀지에서 만났다.

한국 독립영화의 대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맏형 등 묵직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김 감독은 1987년 한국 최초로 비제도권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영화인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의 호들갑 속에서 달동네 재개발 사업의 폭풍이 휘몰아친 상계동 달동네 세입자들과 함께 3년을 생활하며 철거민들의 투쟁과 고통을 담아낸 김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1988, 27분)과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6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관한 기록 <명성, 그 6일의 기록>(1997, 74분)은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특히, <명성…>은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독립영화에 주어지는 운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음은 김동원 감독과의 일문일답

-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들을 만났을 때 처음부터 이것을 다큐멘터리로 만들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12년을 끌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중요한 역사적 체험을 하신 분들이니까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은 강했다. 장기수 선생님들도 몇가지 부류가 있다. 빨치산과 통혁당 인혁당 같은 조직사건, 조작간첩, 남파간첩 이렇게 네 부류다. 첫 촬영 때 만해도 간첩에 대해서 언급하는 게 위험했었다. 처음에는 빨치산에 대해서 연구를 했고 또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조직사건에 대해서도 두 개 했고…. 그러다가 후반으로 가면서 '이제는 간첩 이야기도 할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송환>에 대한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 한 인터뷰를 보면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송환>을 가제로 설정하기는 했지만, <귀향>이라는 제목도 염두에 두었다고 했다. 결국 <송환>으로 결정한, 제목에 얽힌 이야기 좀 해달라.
"'송환'이라는 단어는 군사용어인데 사실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영어로 'Repatriation'인데 미국사람들도 그 단어를 모르더라. 재미 없는 단어다. '송환'은 남쪽에서 보내는 의미인 반면 '귀향'은 할아버지들 입장에서 바라본 거다.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차이이다. 할아버지들 입장이라면 당연히 '귀향'이라고 해야 하는데 편집을 하면서 내가 아직은 할아버지들을 충분히 안다고 할 수도 없고, '이게 나의 관점이지 할아버지들의 관점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결국은 남한 사람인 '나'의 시선으로 만든 영화라 '송환'으로 정했다. '송환'이라는 말이 굉장히 재미없고 딱딱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정치적 현실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 영화 초반부에 한국 정부가 이들을 '미전향장기수'라고 지칭한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점차 이들이 '비전향장기수'로 탈바꿈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미전향장기수'는 매우 무례한 표현으로서 대한민국 당국의 입장이었다. 할아버지들 입장은 영원히 전향을 안 할 거지, 아직 안 한 게 아니지 않나? 할아버지들도 그 표현에 대해서 많이 불쾌해 하셨다. '너희들은 공산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너희들은 포기할 놈들이다'라는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표현이 바로 '미전향'이라는 말이었다. 언어의 폭력이라고 생각해서 꼭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다."

-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감독은 처음부터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대 갔다와서 부터니까 나는 영화를 늦게 시작한 편이다. 그전에 연극을 할까 생각했고 특히 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는데 배우 소질은 없는 것 같아서 연극 연출 쪽으로 나갔다. 학교 때부터 따지면 한 5~6년 연출을 했지만 무대에서만 살아야된다는 게 좀 답답했다. 돌아다니고도 싶고 영화라는 게 화려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로 바꿨는데, 물론 그때 다른 영화는 없었으니까 상업영화 밖에 몰랐다.

스필버그를 목표로 하고, 이장호, 정지영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5년 했다. 그때가 맨날 데모하던 80년대인데, 그와 같은 정치적 상황에서 영화만 한다는 게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죄책감도 들었다. 그 무렵에 상계동에 가게됐다. 철거민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신부님 한 분이 상계동에 와서 현장을 좀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해서 간 것이다. 들어가자마자 철거를 목격하게 됐고 정신없이 찍기 시작했다. 거기서 우리 사회에 대해 내가 모르던 많은 사실 알게됐다."

- <송환>은 감독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처음으로 '작가'의 입장을 내세운 작품으로 보여진다.
"상계동이나 행당동의 경우, 내가 거기서 같이 살았는데 그때는 TV에서 보는 것만 알았지 다큐멘터리도 몰랐다. 아주 나중인 90년대 후반에 외국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형식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고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 또 다른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영화 <송환>은 비전향장기수를 다루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그 당시에는 '나도 전향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말하자면 시대가 바뀌면서 386세대들이 자신의 과거와 다른 길을 가게 됐지 않나. 80년대에 같이 영화 운동하던 친구들도 다 상업영화 쪽으로 갔다. 나이가 들고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나도 그랬다. 그런데 상계동에서 내가 배운 게 많았기 때문에 배신할 수가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기도 했지만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나면서 다시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지난 4월경 <송환>이 관객 1만 8000명을 동원해 박기복 감독의 <영매>(2002)의 기록을 앞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극장 관객은 지금까지 한 2만 5000명 정도다. 지난 5월부터는 학교나 지방을 중심으로 계속 순회상영을 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그것도 한 2만 5000명쯤 됐을 것이다. 올해 순회상영에서만 대략 3만명까지 가지 않을까 예상한다."

-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한국에서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걸릴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다. 처음 극장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가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1995)'였고 두 번째가 <영매>, <송환>이 아마 세 번째일 것이다. 그전에는 방송국 밖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없었다가 80년대 후반부터 시작이 됐는데, 그때는 운동을 위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지 극장에 상영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또 극장용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외국영화제를 보면서 '이럴 수도 있구나'하는 걸 90년대 중반에 들어 와서야 알았다. 그리고 변영주 감독이 <낮은 목소리>로 시작을 한 거다. 사실 다큐멘터리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검열을 빼고는 영화를 이야기할 수 없지 않나. 90년대 중반까지도 독립영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한국 상황이 가난하기도 했고 그런 경제적인 부분과 정치적인 상황이 극장용 다큐멘터리는 상상할 수 없게끔 만들었던 거다."

- <송환>의 제작 기간이 12년을 끌면서 촬영 담당이 자주 바뀌었다. 이를테면 김태일, 변영주 감독 등 많은 분들이 촬영에 참가했다.
"김태일 감독이나 변영주 감독이 지금은 다 독립했지만, 그때는 같은 식구였다. <송환>은 내 프로젝트이기도 했지만 푸른영상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때 그때 시간이 되는 사람이랑 같이 가서 촬영했다."

-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이 장장 45년, 세계 최장기 복역수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던 김선명 선생이 93세의 어머니와 만나는 장면이었다.
"'에미 말을 들었어야지'하는 부분 말인가? 그 장면은 내가 촬영한 게 아니라 김태일씨가 찍었다. 신문기자들이나 다른 방송국에서 상봉 장면을 찍고 싶어 했지만 다 거절 당하고 '푸른영상'만 허용돼 찍을 수 있었는데 김 할아버지 가족들이 카메라를 극도로 경계하는 통에 촬영이 힘들었다. 김태일 감독이 워낙 허술하게 생겼기 때문에(웃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김태일 감독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눈도 안보이고 귀도 잘 안들리지만 직감적으로 아들을 알아보고 뱉어낸 첫 마디가 '에미 말을 들었어야지'였다. 김 감독이 촬영하면서 울었다고 하더라."

- 할아버지 한 분이 친척들을 만나는 자리를 촬영 중이던 감독은 쫓겨난 건 아니지만 무언의 압력에 떠밀려 자리를 떠나게 된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친척분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을 수도 있다. 후에 친척 한 사람이 감독의 숙소로 찾아와서 영화 개봉이나 촬영에 대한 각서를 요구하는데….
"그분들의 걱정이 내게는 비현실적이었지만, 그분들에게는 현실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공포의 시대를 살아왔는가 하는 걸 알게 됐고, 그분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연좌제의 공포 같은 것은 엄연한 현실이라는 걸 느끼게 해줬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고 본다."

- <송환>은 국가보안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근 어디를 가든 국가보안법 논쟁이 뜨겁다. 국가보안법은 증오를 가르치는 증오의 법이다. 어떤 나이트클럽의 웨이터 하나가 김정일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잡혀가는 등의 난센스가 무지 많았는데도 국가보안법이 건재하다는 건 부조리한 일이다. 우리는 증오와 불신의 시대를 살아왔고 국가보안법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쳐왔다. 그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면 가장 처음 해야할 일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형식적으로도 모순이다. 북한이 엄연한 하나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단체로 인정하는 자기 모순에 빠지는 법이기 때문에 엉터리 법인 것이다."

- 영화 속 감독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보수 언론을 조롱하는 장면을 삽입했다. 할아버지들이 송환되기 전 축하하는 자리였는데, 할아버지들의 훈계에 답하던 기자가 식은땀을 흘리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영화를 만들면서 언론메체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결국 언론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북한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거니까 매체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카메라를 할아버지들 쪽으로 잡지않고 일부러 기자들을 찍었는데 기자들이 연기를 잘해줬지. 그 <조선일보> 기자는 사진기자니까 사진만 찍고 갔으면 괜찮았을텐데…. 할아버지들이 이들에게 훈계를 하는 장면이 재밌었고, <조선일보>는 또 보수언론의 상징이지 않나. 기자의 머리에 땀방울을 표시한 건 조롱이라기 보다 풍자의 의미였다."

- 소풍 장면에서 한 할아버지가 김일성 찬가를 부른다. 감독이 처음에는 독백 형식으로 이끌어 오다가 이 장면에서는 관여하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는데, 어떤 시각으로 봐야할지 흔들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일단 노래를 부르는 장면 자체가 재미있었고, 노래가 사람을 잘 표현하니까 굳이 끼어들 필요를 못 느꼈을 뿐이다."

- 이 영화가 특이한 것은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포로로 생활하신 할아버지들 자체가 어쩌면 '사상'의 포로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그분들을 사상의 포로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분들 입장에서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분들이 겪은 해방 전후의 경험들과 감옥에만 갇혀있었기 때문에 달라진 현실을 알 수 없었다는 점에서 사상의 포로일 수 있지만…. 음….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사상을 지키기가 쉬웠다'. '전향공작을 많이 받았지만 그분들이 비전향으로 남기가 쉬웠다'라고. 밖에 있었던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사상을 지키기가 쉬웠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을 보는 내 시선은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그 분들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비판할 수 없었다. 현실에 맞게 이야기 한다면 그분들에게 잔인한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질문을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거다."

- 제작기간 12년, 테이프 500개, 800시간의 촬영분량….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토록 방대한 양의 필름을 편집하는 일도 장난이 아니었을텐데, 편집과정에서 원칙 같은 게 있었나 ?
"일단 주요 등장인물들을 설정했다. 나와 처음 만났던 조창손씨가 주인공이고 그와 가깝게 지낸 사람들과 관계된 사람들의 화면들을 추려서 가편집을 했다. 이야기 진행상 너무 디테일한 부분은 잘라냈다. 처음 구성에는 한두 사람 더 있었는데 죄송한 일이지만 제외하고, 주요 인물 중심으로 화면을 고른 뒤에, 중요하다, 재미있다고 판단되는 사건 같은 것들을 추렸다."

- 영화에는 수많은 일화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꽃동네 오웅진 신부와 할아버지들의 갈등이 비중있게 소개된다. 여기서도 감독은 이들의 대화를 관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감독은 작가의 시각을 최대한 지우려고 노력했나 ?
"내 의견을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한 것 같다. 비록 영화 속에는 표현이 안 됐지만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가 할아버지들을 억압하고 거짓말을 했다. '류한욱 선생이 여기(꽃동네)에 있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 여기는 편하고 문제가 없다'고 오 신부가 말을 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할아버지가 '여기서 책을 못 보게 한다'고 말을 하는 거다. 오 신부를 비판하려는 의도였는데, 오 신부를 너무 몰아가는 것 같아서 거짓말 하는 장면을 뺐다. 장기수 선생들이 성경을 모르는 채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신부에게 마르크스도 읽어보라고 되받아 치는 것들을 봤다. 거기서 내가 발견한 것은 장기수 선생들이 아주 당당했다는 거다."

- 크리스 마커의 <방파제>(1962)에서 처럼 <송환>에는 유난히 스톱모션이나 사진으로 처리하는 장면이 많은 것도 특이하다. 이를테면 김선명 선생과 어머니의 상봉 장면이라든지,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사진이 하나씩 보여지는 장면 등. 모자의 만남이 마지막이었고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는 어떤 단절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었나 ?
"스톱모션이나 사진을 많이 쓰기는 했다. 할아버지들의 사진이 많이 들어간 것은 장기수 몇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것이 다른 분들에게 죄송했기 때문이다. 얼굴이라도 한 번씩 등장시키고 싶었고 또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김선명 할아버지 장면을 스틸 처리한 것은 다른 작품에서도 써 먹은 적이 있는데 좀 더 다르게 표현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의 원본 테이프가 약간 손상됐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 북한이 스스로 하나의 거대한 감옥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남한의 감옥에서 북한이라는 감옥으로 할아버지들이 옮겨간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분단 국가를 살고 있는 자들의 현실이다. 감독은 통일에 비관적인가?
"통일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되어야 한다. 북한사회의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지만 남한이 껴안을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만약 남북화해가 이뤄진다면 경제적인 문제라든가 정치적 조건의 다름은 생각하는 것 만큼 복잡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의 존재다. 미국이 통일을 '허락'(웃음)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 영화에는 '할아버지들이 왜 모든 사회 병폐들을 미국의 탓으로 돌리는가' 하고 반문하는 부분이 있다. 북한 방문을 신청했던 일본인 작가가 '한반도의 문제는 북한의 문제'라고 말을 하는데, 감독은 '북한과 미국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그 말이 맞지 않나? 미국이 해방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해 왔는지, 한국전쟁을 포함해서 현재까지 한반도와 미국의 관계가 어떤건지 드러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부시 때문에 사람들이 미국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또 미국의 이미지가 달라지긴 했지만 미국은 그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한국에 끼쳐왔지 않나.

특히 30분만에 38선을 그은 것이 미국이고, 분단과 한국 전쟁 책임의 절반 이상은 미국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통일을 가장 싫어하고 방해하는 것도 미국이다. 신세대 젊은 친구들은 정치 언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통일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통일에 대한 시각은 충분히 표현했다고 자평한다."

- <송환>은 어떤 관객층을 대상으로 만들어 졌나 ?
"삶을 바꾼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처음에는 386세대를 생각했다. 그 다음이 젊은층인데 이들에게 '통일이 필요하지 않니?'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 영화 속의 할아버지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천진난만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이 사회에서 늘 '금지된 인물'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송환 촉구 시위' 현장에서 한 시민이 '퍽큐'라고 욕하는 장면을 삽입한 건가 ?
"그게(송환에 반감을 갖는 것) 주류이고 현실이다. 할아버지들의 송환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 그러면서도 '퍽큐' 장면은 '이제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당연히 빨갱이 이야기가 나오면 꼬리를 내려야 되는데 '이제는 맞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욕하는 시민에게 함세환 선생이 그랬다. '너 몇 살이니 ?', '말을 함부로 하지 마', '너 같은 놈들 때문에 통일이 안돼'. 개인적으로 함세환 선생을 참 좋아하는데, 점잖치 못하게 싸우지만 그게 바로 그분의 매력이다."

- <송환>의 해외 배급 상태는?
"미국과 일본 배급업자는 결정됐지만 유럽은 아직 배급사를 못 찾았다."

- 부산국제영화제에 왔으니까 영화제 이야기도 빼놓으면 안 될 것 같다. 감독은 여러 번 부산영화제에 참가했는데 영화제를 평가한다면?
"영화제 초창기에는 매년 왔는데 2000년 이후에는 올해가 처음이다. 영화제가 너무 커져버려서 재미가 없다. 부산영화제는 전통적으로 독립영화, 와이드앵글에 비중을 뒀는데 영화제 규모가 커질수록 이 부분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상이 들어서 옛날만큼 재미가 없다는 거다.

보통 내 작품을 소개하러 온다. <명성, 그 6일의 기록>, <행당동 사람들>, <또 하나의 세상> 등을 소개했고, 이번에는 <송환>으로 왔으니까 네 번째 방문이다. 부산영화제가 좋은 건 술먹기가 편하다는 건데 젊었을 때는 그런 게 재미있었지만 이제는 늙어서 그런지 몸이 안 따라준다(웃음)."

- 감독은 환갑 전에 극영화 한편 찍고 싶다는 말을 한 일도 있다.
"다큐멘터리도 표현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인터뷰라든지 자료화면에만 의존한다는 게 재미가 없지 않나. 차라리 이런 걸 드라마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내가 옛날에 코미디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코미디를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

- 구체적인 계획은?
"원래 계획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사실은 지금 단편을 하나 하고 있다. 내년에 개봉될 영화인데,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하는 <여섯개의 시선2> 중에 한 꼭지를 하게됐다. 중국 동포들 이야기이다. 중국 동포들을 직접 배우로 출연시켜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게끔 하는 것.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중국 동포들 문제는 굉장히 복잡하다. 이것을 외국인 노동자 문제로 보면 간단하지만 동포 아닌가. 그렇다고 민족의 문제로 푸는 것은 민족주의의 혐의를 받을 수도 있고….

그들이 왜 거기서 살게 됐나를 살펴보면 지금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미국이나 유럽 동포들은 재외 동포법의 혜택을 받지만 중국과 러시아 동포들은 그렇지 못하다. 같은 동포 안에서의 계급 차별을 다뤄보고 싶다.

현재 한국에 대한 중국 동포들의 원망이 굉장히 크다. 연변에서 한국사람들을 노골적으로 싫어할 만큼 한국인들이 못된 짓을 많이 한거지. 그분들이 통일 후나 통일의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들인데 그분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참 곤란하다.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인정받는 자치정부를 세웠는데 개방 이후 한국때문에 조선족들이 완전히 몰락했다고 하더라.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사실 <여섯개…>에서 상계동 그후의 이야기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서 다시 미루게 됐다."

- <여섯개…> 작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작업 중에서 재정적으로 가장 든든할 것 같기도 한데….
"(웃음)그렇다. 그런데 '커피가 조금밖에 없네'와 '어! 아직도 있네'의 차이와도 같은 거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굶어죽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사니까 힘들지는 않았다."

- 특별히 좋아하는 다큐멘터리스트가 있나 ?
"<파나마 사기극>(1992)을 만든 바바라 트렌트를 좋아한다. 60년대 나리따 공항 건설 때 농부들이 일본 정부의 철거 정책에 대항해 투쟁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오가와 신스케도 좋아하는데, 이 사람이 나중에는 철거 농민과 같이 살았다고 한다. 오가와 신스케를 처음 만나고 알게된 병원에서 30분 동안 다큐멘터리 이야기만 했다. 프랑스의 경우 니콜라 필리베르의 <마지막 수업>(2002)이 좋았다. 그리고…시각이 너무 단순하고 방법적인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마이클 무어의 유머도 좋아한다. 그러나 <화씨 9/11>(2004)의 경우, 영화를 서둘러 끝낸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2004-10-13 08:55 ⓒ 2007 OhmyNews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