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TV에서 올림픽 전사들의 환영식을 지켜보는데 유독 내 눈길을 잡아끄는 한 선수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양태영 선수였다. 다행히 어깨가 축 늘어진 패잔병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 속의 그늘까지 다 걷어내진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양태영 선수는 누가 뭐래도 우리의 영웅이다. 우리는 양 선수의 목에 걸린, 환하게 빛나는 금메달을 보았다. 또 그의 머리를 장식한 금빛 월계관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양 선수는 진정한 승자만이 간직할 수 있는 긍지와 자부심을 금메달과 월계관 삼아 당당히 개선한 것이다.

반면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도망치듯 아테네를 빠져나간 폴 햄은 어떠한가? 지금 당장은 그의 목에 걸린 금메달이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지겠지만, 머지 않아 그것이 평생 그의 목을 옥죄는 올가미란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득 오노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지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을 가로챈 오노는 지금 행복할까? 여전히 자신이 챔피언이라고 확신하고 있을까? 변함없이 자기가 결백하다고 주장할까?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세월에 비례해 상처는 더 깊어지고 고통의 무게 또한 늘어나지 않았을까. 그것이 인지상정이니까. 폴 햄이 선택한 길 역시 오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승자 리마

이들과 다른 길을 선택해 평생 짊어져야 할 고통의 멍에를 단번에 훌훌 털어버린 진정한 영웅이 있다. 그는 다름아닌 브라질의 마라톤 선수 반데를레이 데 리마다.

그는 아테네 올림픽 폐막식 직전 거행된 마라톤 경기에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선두로 나서 결승점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달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남자가 뛰어들어 선두를 달리던 리마의 앞을 가로막고 길가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어이없는 돌발 상황에 모두가 경악했고 한동안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진행요원들과 관중들이 상황을 수습해 간신히 경기는 재개되었다.

잘 알다시피 마라톤 경기에서 선수들은 외부와 거의 단절된 상태로 42.195km를 달리게 되어 있다. 그 누구도 달리는 선수에게 물리적 영향력을 가할 수 없고, 진로를 방해해서도 안 된다. 오직 자신의 그림자를 벗삼아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는 고독한 질주가 바로 마라톤이다.

특히 마라톤에서 중요한 것은 호흡과 리듬이다. 선수들은 각자 일정한 호흡과 리듬을 유지하며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려야 하기 때문. 그 호흡과 리듬이 중간에 중단되거나 불규칙해지면 경기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난 시드니 올림픽에서 이봉주 선수가 부진했던 이유도 경기 도중 발에 걸려 넘어져 경기 감각과 리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상 리마는 거의 경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경기 도중 주로를 이탈한 마라토너는 박자를 놓친 연주자와 다를 바 없다. 어렵게 재개한 레이스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거추장스러웠는지 리마는 곧 선두를 내주었고, 조금씩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분 후 우리는 두 팔을 비행기 날개처럼 펼치고 춤을 추듯 결승점을 통과하는 리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고, 후회나 원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내 가슴 속에도 미소가 가득 번졌고, 리마에 대한 존경심마저 싹텄다.

비록 리마는 스테파노 발디니(이탈리아)에게 1위를 내주고, 예상치 못한 훼방꾼 덕분에 3위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의 이름은 제28회 아테네 올림픽의 진정한 승자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리스신들의 장난

이제 짧았던 축제가 끝나고, 지난 보름 동안 올림푸스 산을 환히 밝히던 성화도 한 줄기 미풍에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리스 신들이 장난처럼 내던진 주사위는 여전히 우리의 손에 남아 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폴 햄과 리마. 이 두 사람은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한 사람은 달콤한 독배를, 한 사람은 쓰디쓴 양약을 집어들었다. 한 사람은 수치스런 승리를, 한 사람은 아름다운 패배를 선택했다. 한 사람은 찰나의 영광과 기나긴 고통을, 한 사람은 순간의 고통과 불멸의 영광을 선택한 것이다. 과연 폴 햄과 리마 중 누가 진정한 승자일까? 그리스 신들은 누굴 선택한 걸까? 올림픽은 끝났지만, 신들의 주사위는 아직 우리 손에 남아 있다.
2004-09-01 15:47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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