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아무개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전 프로야구 감독 김동엽(57)씨가 오늘 오전 10시 35분쯤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고인은 침대 위에서 엎드린 자세로 아파트 청소원에 의해 발견, 경찰에 신고됐습니다. 화면 서울 용산구 이촌동 모 독신자아파트. 사고 현장을 조사하는 경찰들의 모습. 방안에 침대가 보인다. 청소원 2-3일전부터 보이지 않더라구요. 2층 복도를 청소하는데 텔레비전 소리만 크게 나는거예요. 문을 두드렸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어서 마스터키로 열고 들어갔죠. 기자 청소원 아무개씨는 발견 당시 심한 악취가 났다고 증언했습니다. 경찰은 발견 당시 창문이 닫혀 있었고, 전기난로가 켜져 있었던 점. 그리고 몸에 특별한 외상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산소 부족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가리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할 것으로 보입니다. 평소에도 김동엽 감독은 고혈압과 심근경색을 앓아 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97년 4월 10일, '빨간 장갑의 마술사'는 그렇게 무대 뒤로 사라졌다. 야구계의 기인으로 알려진 김동엽 감독. 그의 별명이 생겨나게 된 에피소드 역시 예사롭지 않다.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황진규씨는 USA조선을 통해 "체육부 말단 기자로 비인기 종목을 맡고 있던 차에 담당 기자가 없어 야구장을 나갔다 한양대 야구팀 감독 김동엽씨를 처음 보게 됐다. 빨간 장갑을 끼고 요란하게 사인을 보내는 김동엽 감독을 보고 '빨간 장갑의 마술사가 선수는 물론 관중들의 시선도 사로잡았다'로 리드를 잡아 박스기사를 쓰게 됐다"며 "며칠 뒤부터 다른 신문에서도 빨간 장갑의 마술사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는 쇼맨쉽과 입담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별명만큼 재미있는 뒷 얘기도 무성하다. 영구 결번된 김용수 선수의 등번호가 바뀌게 된 사연도 그렇다. 원래 김용수 선수는 1985년 입단할 때만 해도 38번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6.25때 월남한 김동엽 감독은 이른바 '38 따라지'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고 한다. 결국 김용수 선수는 38번을 김동엽 감독에게 양보하고 1986년 시즌부터 41번을 달기 시작했다. 김동엽 감독은 '야구계의 기인'으로 통했다. "어필은 감독이 해야할 또 하나의 일이다. 날마다 새로운 어필을 생각하고 운동장에 선다"는 독특한 이론을 펼쳤고, 지인들에게는 "내가 죽거든 딴 것은 필요 없다. 관속에 화투와 카드 한 모씩만 넣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동엽 감독의 야구 인생에는 가슴 아픈 80년대 현대사도 숨어 있다. 1983년 김동엽 감독이 이끌던 MBC 청룡은 후기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고 해태타이거즈와 우승을 다투게 된다. 당시 야구 전문가들은 2위 팀을 5게임차로 따돌리며 무서운 상승세를 과시하고 있던 MBC청룡의 우세를 점쳤다. 여기에 김동엽 감독은 구단 보너스를 책임지겠다며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는다. 그러나 김동엽 감독과 MBC청룡에게 악재가 터지고 만다. 10월 8일 김동엽 감독이 택시운전사와 멱살잡이 시비를 벌이다 폭력혐의로 입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바로 다음날에는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난다. 당초 12일에 열릴 예정이었던 한국시리즈는 쌀쌀한 날씨와 얼어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15일에 개막된다. 결과는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 물론 MBC청룡의 분위기 저하에는 김동엽 감독이 약속했던 '후기리그 우승 포상금 5백만원'이 지켜지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 경향신문 스포츠레저부 이영만 부국장은 모 사이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 사건이 결국 기세등등하던 MBC청룡의 기운을 죽였고, 휴식기간이 길어지면서 청룡은 제 풀에 쓰러지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이영만 부국장은 "약한 전력으로 첫 우승을 차지한 해태가 강팀으로 부상하면서 한국시리즈를 9번이나 제패하게 됐다"며 "만약 아웅산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한국 프로야구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적고 있다. 김동엽 감독이 초대 해태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인연에는 5.18 광주민중항쟁이 숨어 있다. 한겨레신문은 "1980년 4월 시작한 MBC 라디오 '홈런출발'의 구성작가 김광휘씨가 5.18때 진행자인 김동엽(당시 한양대 야구부 감독)씨의 입을 빌려 '지금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지길 바란다'는 독설을 내뱉는 사고를 쳐 군부정권의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며 "이 발언이 인연이 돼 김 감독이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해태타이거즈의 초대 감독으로 영입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이 같은 인연은 김동엽 감독이 야구계 일선에서 물러난 뒤 TV와 라디오에서 각종 프로그램 해설가로 출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일성 KBS 해설위원은 9일 전화를 통해 "지금 내가 하는 해설 스타일은 김동엽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과감하게 예상을 많이 하라. 감독이 승부처에서 승부를 걸듯이 해설에도 승부를 걸어라'고 조언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하일성 위원은 '야구인 김동엽 감독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분은 프로였다. 운동장에서 섹시하게 보여야 한다며 뒷주머니에 수건을 넣어 엉덩이를 돋보이게 했을 정도로 관중들을 굉장히 즐겁게 해준 감독이었다"며 "너무 튀기도 했지만, 그만큼 상당히 개혁적인 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평가가 절하돼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 어쩌면 '야구인 김동엽'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빨간 장갑의 마술에 취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